01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해 만든 과일 바구니. 다양한 색깔로 제작되었다  02 너무도 유명한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 디자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뉴욕현대미술관인 모마에 영구 소장되었다 

꿈을 만드는 공장, 알레시

좋은 디자인이 명품과 비명품의 차이를 구분 짓는 시대다.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명품이라 불리는 거미 모양의 과일즙 짜는 도구, 쥬시 살리프(Juicy Salif)나 귀여운 여인 모양의 안나 G(Anna G) 와인 오프너는 한번쯤 본 적이 있을테다. 이처럼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어당긴 이 제품들은, 다양하고 탁월한 디자인으로 주방용품 업계를 평정한 알레시(Alessi)의 제품들이다. 스스로를 꿈의 공장이라 부르는 알레시의 세상은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을까.

 설립 이후 알레시가 소비자들에게 선보인 제품들의 수는 3,000개를 상회한다. 1920년대 설립되어 이미 90년의 역사가 지났으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알레시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다른 브랜드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알레시 가문의 3세대 CEO이자 알레시 디자인의 자리를 잡게 한 알베르토 알레시(Alberto Alessi)의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03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컨테이너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04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지로톤도 시리즈의 쟁반. 단순하면서도 조화로운 디자인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05 귀여운 디자인의 차 여과기. 스테파노 피로바노(Stefano Pirovano)의 디자인이다  06 리하르트 사퍼의 에스프레소 커피 메이커. 이 디자인을 발판으로 알레시는 세계적인 디자인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60개국 수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다

알레시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디자인 붐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업 중 하나다. 1921년 이탈리아의 오메그나(Omegna)라는 지역의 크루시날로(Crusinallo)에서 판금기술자인 지오바니 알레시(Giovanni Alessi)가 창업한 생활용품 전문 브랜드인 알레시는 현재 60여 개국에 수출을 하는 글로벌 컴퍼니로 성장했다. 지오바니가 회사를 처음 연 2~30년대에는 주로 구리와 니켈, 동, 은 등으로 수공예 테이블웨어를 비롯한 주방용품들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판금기술을 바탕으로 제품 생산을 했기 때문에 디자인보다는 품질에 중점을 두어 제품을 제작했다고. 이 시기에는 우아하고 럭셔리한 명품 이미지의 주방용품들을 주로 생산했는데, 지금처럼 유쾌하고 경쾌한 디자인의 제품들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설립자의 손자인 알베르토 알레시가 회사 경영을 맡으면서부터다.

대표직에 오른 알베르토는 기존에 알레시가 고수하고 있던 인하우스 디자인 정책을 전면 변경, 많은 외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디자인을 하고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알베르토는 70년대에 천재 건축가로 이름을 떨치던 리하르트 사퍼(Richard Sapper)에게 커피 메이커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2년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출시한 첫 제품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인들에게 알레시라는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01, 02 귀여운 디자인의 애완동물용 밥그릇  03 다양한 패션감각을
선보이는 알레산드로 M 와인 오프너들. 이탈리아의 유명 패션 브랜드인 발렌티노, 프라다, 베르사체의 패션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후 1982년에는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와 손잡고 커피 메이커 시리즈의 두 번째 제품을 선보였는데, 이 역시 큰 인기를 얻으며 ‘예술적 가치를 지닌 주방용품 전문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된다. 이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가 본격적으로 제품 디자인에 참여하면서 알레시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생활용품 브랜드가 되었다. 현재도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물론 스테파노 지오바노니(Stefano Giovannoni),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론 아라드(Ron Arad) 등 세계적인 건축가, 디자이너들이 알레시와 함께 일하고 있다.

알레시 디자인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각각의 컨셉을 가지고 연속성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데, 이는 알레시의 독특한 개성이자 알레시라는 이름 아래 수없이 다양한 개성을 하나로 묶어내는 방식이 되었다. 그래서 알레시 디자인의 특징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다만 장난스러우면서도 친밀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며, 기능적이면서도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낭만 등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니고 있다. 알베르토 알레시가 정의한 ‘드림 팩토리’라는 말은 바로 이런 디자인 철학을 대변한다. 그래서 지금도 알레시는 이 원칙을 견지하면서 유럽 뿐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 전 세계 다양한 국가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90년 역사의 산증인, 알레시 뮤지엄

이렇게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유명 디자이너들의 예술작품으로 세계인들에게 평가를 받게 된 알레시는 100여 년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들의 역사와 작품들을 오래도록 보존할 필요성-실제로 생활용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모마에 영구 보존된 제품들도 있다-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지난 1998년 문을 연 알레시 박물관(Museo Alessi)이다. 이 박물관은 크루시날로에 위치한 알레시 본사에 함께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제품들과 제품 개발을 위해 시험용으로 만들었던 프로토타입 제품들, 현재는 생산되지 않는 과거의 인기 제품 등은 물론 알레시의 제품들이 실린 오래된 잡지나 카탈로그, 디자이너의 스케치, 자료, 도면, 관련 사진 등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전시품들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알레시의 지난 역사를 총망라해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또, 그저 단순히 똑같은 제품들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상설, 특설 전시회를 여는 등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디자인 브랜드답게 박물관의 실내 디자인을 유명 디자이너인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맡은 것도 특징. 리서처나 학자, 언론인, 학생 등 이곳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사전 예약을 거쳐 둘러볼 수 있다.


04, 05 모던하게, 그러면서도 재치있고 유쾌하게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알레시의 장점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알레시의 얼굴들

알레시는 현재 알레시라는 공통된 아이덴티티를 지니면서도 서로 다른 컨셉을 가진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더욱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소량 또는 한정 생산을 많이 하는 오피시나 알레시(Officina Alessi)는 가장 비싼 브랜드 라인. 이와 함께 오피시나 알레시보다는 친근한 디자인과 알맞은 가격대로 선보이는 아 디 알레시(A Di Alessi), 가장 대중적인 제품군이자 대규모 생산품인 알레시(Alessi)까지 모두 세 가지의 브랜드 라인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알레시는 90여 년의 긴 역사 동안 무려 3,000여 개가 넘는 제품들을 생산해왔다. 그중 그들의 역사에 가장 오래 남을만한 제품, 아니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알베르토 알레시를 비롯, 알레시의 관계자와 비관계자 모두가 인정하는 제품들에는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안나 G’와 마이클 그레이브스의 ‘버드 키친(Bird Kitchen) 주전자’, 스테파노 지오바노니의 ‘지로톤도 시리즈(Girotondo Series)’,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 등이 있다.

안나 G 와인 오프너는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와인 오프너를 디자인하던 중 1994년 그의 여자친구인 안나 질리(Anna Gili)에게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제품이다. 처음에는 기자들에게 줄 홍보용으로 만들었으나 그 후 빗발치는 구매 문의 전화 때문에 판매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현재까지 천만 개 이상이 판매될 만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 소비자들의 요구로 안나의 남자친구인 ‘알레산드로 M-물론 이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자신을 모델로 디자인한 것이다-’까지 탄생해 커플로 팔려나가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알레시의 얼굴마담이다. 이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제품 중 하나는 스테파노 지오바노니의 지로톤도 시리즈. 지로톤도는 우리나라의 강강술래와 비슷한 놀이를 일컫는 이탈리아어로, 단순한 디자인과 지로톤도 놀이를 하는 소년, 소녀의 모습이 조화를 이룬다. 쟁반부터 각종 식기에 이르는 이 시리즈는 89년에 출시된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700만 개 이상이 팔려나가며 대히트를 쳤다. 


06 스테파노 지오바노니와 일본의 디자이너인 루미코 타케다(Rumiko Takeda)의 합작품으로 동양의 미를 물씬 풍긴다  07 귀여운 토끼의 귀를 잡아당기면 이쑤시개들이 올라온다  08 전 세계적으로 천만 개 이상이 팔리며 명실상부한 주방용품 업계 최대의 히트제품으로 불리는 안나 G 와인 오프너  09 한국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알레시의 제품을 디자인한 김형정 디자이너의 도치  10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새 둥지 모양의 과일 바구니

물론, 지금도 지로톤도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거미를 연상시키는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비록 너무도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실용성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 제품이지만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로 완성해낸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은 단순히 주방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라도 구매할 만큼 강한 소유욕을 불러일으켰고, 그렇게 쥬시 살리프 역시 알레시의 대표 제품이 되었다.

지난 2002년에는 한국인 디자이너의 제품이 한국 최초의 알레시 제품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고슴도치를 형상화한 단순한 모양의 사무용품인 ‘도치(Dozi)’는 몸통이 자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책상 위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클립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제품. 알레시의 수많은 제품들 중에서도 잘 팔리지 않아 실패하는 것들이 있는 것에 반해, 도치는 제품화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서도 알레시의 제품들은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등 많은 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데, 특히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직접 디자인을 맡은 플래그십 스토어(02-3444-1541, 서울시 강남구 청담2동 9-4)가 청담동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글 김영리 기자｜자료제공 알레시(www.aless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