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황홀하려면

더 뜨거워야 한다
 

테라스에서 카메라주인님께 사건을 소상히 보고드리고 카메라 가격을 알아본다고 잔뜩 인상쓰고 있을때

바로 옆 햇살이 비치는 명당자리엔 북미 사람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 남자들 예닐곱이서도 이렇게 수다를 떨 수 있구나, 싸움하는 통영항 아줌마들 저리가리임 -_-

여튼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인 '남자들 수다의 빨래법칙'의 위대함을 확인중이었는데,

그 와중에 "너 여자친구 있지?" "응" "너 여자친구 사랑하니?" "....Yes, I guess so. She is perfect."

핫한 에스빠냐 세뇨리따들이,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이 여행자들만 보더라도

이 로맨틱한 도시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데이트나 밤을 보낸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와중에 신체건강한 대학생 '남자들끼리' 와서는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아니,

여자친구를 사랑하냐는 질문(근데 질문하는 얘는 또 뭔가)에 Yes,라고 답하다니, 게다가 She is perfect.

이 봄꽃망울 같이 터질듯말듯한 도시에서 들을 법한 대화 치고는 몹시도 의외이며 귀엽지 않은가.

퍼펙트한 여자친구를 가진 너, 네 무리들의 수다질이 저녁식사 내내 내 귀를 괴롭혔지만, 감히 용서해주겠어.

God bless you both!

지난밤 술 한잔 하면서 바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침 테라스에서 다시 만나 멋적게 인사를 나눈다.

이제서야 제대로 묻는 Where are you fron? Where will you go after this city?

흡연자들은 이럴 때 좋은 거구나, '담배'라는 강력한 모티브가 있으니.

까딸루냐에서 세블럭쯤 떨어진 까사밀라

돈많은 미망인과 결혼한 밀라씨가 가우디에게 의뢰한 렌트아파트

가우디에 대해선 일단 두가지에 놀란다

첫번째, 이게 실존하고 있다는 것

두번째, 이게 진짜 이용할 수 있는 건물이라는 것

천재,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가우디.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릭 클랩튼, 백석, 피카소... 뭐 그 정도 꼽는 천재들, 뭔가 번뜩이면서 결정적인.

아, 그러고보니 조던이나 마돈나도 천재 가까이는 되겠군.

천재성을 발휘하기에 적절한 조건들을 만났다는 건 가우디에게도, 밀라씨에게도, 입주자들에게도,

그리고 지금 까사밀라 테라스를 마쉬멜로처럼 흐느적거리는 여행자들과 나에게도 큰 행운인 듯.

건축이야말로 재능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분야일테니 말이다.

여튼 까사밀라를 걸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가우디,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자유롭고 재밌었을까,다.

'이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쿨한 코웃음을 쳤을까. 생각만 해도 내가 다 짜릿하다.

그는 무게와 힘, 그러니까 '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 것 같다. 일단 이론대로 샘플 구조물을 만들어놓고,

그 철사 위에 생크림따위를 붓지 않았을까. 크림 덩어리를 뽕뽕 뚫어 창을 내고 대충 둥실둥실 두드려 사진으로 팡 찍어 내놓았을 것이다.

힘의 구조가 완전하고 견고하니 뭐든 상관없다. 이왕 할 거 자연에서 따오자.

테라스에 가득한 이 다양한 크림 기둥(?)들도 뭐 딱히 이런 디자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듯.

그에게는 철골로 된 기본 뼈대가 3차원의 도화지였을 것이다.

뭐든 가능한 무한의 변주.

가우디는 아마 이 모든 과정이 행복하고, 재밌고, 또 신났을 것이다.

쓰고 있으면 가우디와 대화라도 하는 것 같아서

직업병처럼 물으면 꼭 그가 내 생각대로 답해주는 것 같아서

목과 어깨를 둥그렇게 지중해 볕에 내놓은 채 옥상에서 오래 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여자분이 내 옷이 예쁘다고 말해줬다, 헤헤.

근데 옷 예쁜 여자는 발에 물집이 터져서 아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열흘 있는동안

가우디는 이 까사밀라 하나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공원, 성당 등등 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하필 집이었던걸까, 라는 의문은

결국 이 도시를 마지막으로 떠나며 알게 된다.

아트티켓(22유로)이 안내해주는대로 찾아간 다음 코스는

Fundacio Antoni Tapies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나서야

가우디에 말랑해진 뇌가 타삐에스의 예술관을 겨우 받아들였음 -_-

그는 까딸란보다는 에스파뇰에 가까운 작업스타일을 보이고 있었는데

동시대의 피카소는 마드리드서 수학해 그렇다지만 타삐에스 이 사람, 참으로 고독하고도 센세이셔널한 존재였을 듯

 


http://blog.naver.com/minsoism/150088681254

201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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