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칼럼(대중문화) - 여성포털이지데이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 할리 베리, 패트릭 윌슨, 존 브래들리

단순한 호기심이 영화 관람을 이끌었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신작 SF 영화 [문폴]이 개봉했다. 사실 나는 [문폴]이 개봉하기 전부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일찌감치 접었다. 그의 전성기 시절 영화인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도 딱히 재미있게 보질 못했고, 그의 최근작인 [미드웨이]도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게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는 시간이 날 때 가볍게 볼만한 킬링타임용에 불과했다. 게다가 [문폴]은 북미에서 흥행이 폭망했다.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를 가지고 현재까지 월드 와이드 4천만 달러를 넘기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코로나19 오미크론 바이러스로 인하여 하루 확진자가 수십만 명이 발생되는 현 상황에서 [문폴]은 가볍게 OTT로 넘겨도 될만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문제이다. 특히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재난 영화는 최소 기본은 했었다. [투모로우]가 그랬고, [2012]가 그랬다. [문폴]의 경우는 달이 궤도를 이탈해서 지구로 추락한다는 내용이다. 이 정도의 재난이라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화 속이 재난보다도 더 스펙터클하다. 달이 지구로 추락하는데 과연 인류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아들이 [문폴]을 극장에서 보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그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재난 영화라면 분명 주인공의 활약으로 인류 멸망의 위기를 넘길 텐데, 과연 어떻게 달의 추락 속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들의 호기심 덕분에 나는 아들과 함께 주말 아침 극장 데이트를 할 수 있었으니 좋았다.

문제는 영화를 보고 나서 아들의 호기심이 분노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2012]같은 재난 영화를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폴]은 달이 인공 구조물이라는 음모론 속에 황당한 SF로 진행된다. 영화를 보기 전 [문폴]의 티저포스터를 통해 달이 인공 구조물이라는 설정을 알아낸 아들은 (티저포스터가 스포일 줄이야...)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러니까 망하지'였다. 나는 뭐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킬링타임용 영화가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아들의 분노를 담아 보기로 했다. 영화의 스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경고하는 바이다. 뭐 스포를 알고 봐도 별문제가 없는 영화이긴 하지만...

억지로 끼워 맞춘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음모론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다. 인류 최초로 달에 첫걸음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에게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인류의 우주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다양한 음모론을 양산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미국의 조작이라는 설이다. (달 착륙 조작 음모론은 영화 [아폴로 프로젝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트랜스포머 3]에서도 아폴로 11호에 대한 음모론이 나온다. 아폴로 11호는 비밀 임무를 띠고 달에 착륙한 것이고,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달의 반대면에는 외계 문명의 우주선이 불시착해 있다는 설정이다.

[문폴]도 아폴로 11호에 대한 음모론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영화의 티저 예고편에서 홀든필드(도널드 서덜랜드)가 이런 말을 한다. '1969년 7월 20일 학교에선 아폴로 11호가 교신 두절됐던 게 2분이라고 배우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들은 그날 뭔가를 발견했고 그걸 50년이나 숨겨 온 거야.' 그렇다면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영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 [문폴]은 곧이어 2011년 우주왕복선에서 위성 수리 작업 중이던 브라이언 하퍼(패트릭 윌슨)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선장 조 파울러(할리 베리)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하던 브라이언은 갑작스러운 정체불명의 외계 물질로부터 습격을 받아 동료를 잃고, 우주 왕복선에서 기절한 조만 데리고 겨우 귀환한다. 이 사건으로 하퍼는 모든 명예를 잃고 나사에서 불명예 퇴직을 당한다.

여기에서부터 설정의 문제가 발생한다. 1969년 아폴로 11호는 달에서 외계 물질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EMP 폭탄을 개발한 것이다. 2011년 외계 물질이 브라이언을 공격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브라이언의 실수로 결론내고 그를 나사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 2021년 달의 궤도가 바뀌며 인류는 멸망의 위기를 맞이한다. 잠깐... 그런데 외계물질은 인류를 공격하기까지 1969년부터 2021년까지 왜 5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지? 외계 물질은 왜 1969년 아폴로 11호를 그냥 보내준 거지? 2011년 외계 물질의 공격성을 알게 된 나사는 왜 EMP 폭탄을 그때 사용하지 않은 거지? 예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하지 말자. 이 모든 의문점은 [문폴]이 아폴로 11호 음모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발생한 설정의 문제이다.

지상에서는 재난 영화, 우주에서는 SF, 투 트랙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욕심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할리우드에서 예전과 같은 위상을 되찾고 싶었던 그는 오랜만에 잡은 블록버스터 연출 기회에서 자신이 잘 하는 모든 것을 쏟아 내려고 한다. 그가 잘하는 것은 SF와 재난 영화이다. 그의 최고 히트작은 당연히 [인디펜던스 데이]이다. [인디펜던스 데이]는 1996년 북미 박스오피스 최고 히트작으로 등재되어 있다. 2004년 개봉한 [투모로우]와 2009년 개봉한 [2012]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히트작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문폴]에 [인디펜던스 데이]의 SF와 [투모로우], [2012]의 재난을 적당히 뒤섞어 버리는 것. 이것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선택한 안전한 흥행 전략이다.

[인디펜던스 데이]는 외계의 거대한 비행 물체가 세계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면서 벌어지는 SF 영화이다. 인류의 기술 문명은 이제 고작 구석기 시대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고도화된 외계의 기술 앞에 인류는 무기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외계 비행 물체와 싸워 결국 승리를 쟁취한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는 [문폴]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단지 다른 것은 외계와의 전쟁이 지구가 아닌 달에서 벌어진다는 것뿐이다. 만약 [문폴]에서 인공 구조물인 달이 오랫동안 지구의 궤도를 돌다가 고장이 나서 지구로 추락하는 것이라면 스토리 구조가 탄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계 문명의 침략이라는 [인디펜던스 데이] 식의 스토리 전개를 넣고 싶었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굳이 외계의 나노 물질이 달을 공격하여 지구로 추락시킨다는 억지 설정을 넣었다. 그리고 주인공 3인방이 외계 나노 물질과 싸워 인류를 지키는 너무 뻔한 전개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주인공 3인방이 달에서 외계 나노 물질과 싸우는 동안 지상에서는 브라이언의 사춘기 아들 소니(찰리 플러머)와 조의 어린 딸, 그리고 젊은 중국인 유모 미셀(켈리 유)이 마치 [2012]와 [투모로우]를 뒤섞은 듯한 재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문제는 [문폴]의 재난 상황이 이전의 재난 영화와의 차별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소니의 계부인 톰(마이클 페냐)의 희생은 [2012]와의 묘한 기시감마저 느껴진다. 달이 지구로 추락한다는 엄청난 재난 상황이 발생했는데, 기존의 재난 영화와 장면이 엇비슷하다면 굳이 달을 추락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영화와 다른 재난 영화의 차별점을 굳이 찾자면 하늘에 뜬 굉장히 큰 달의 모습뿐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온갖 클리셰와 억지 설정의 반복

우리는 이런 영화를 뻔한 영화라고 한다. 좀 더 유식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클리셰 범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폴]에서 새로운 것이라면 달이 인공 구조물이고, 지구로 추락한다는 설정뿐이다. 나머지는 모두가 어디에선가 본 듯하고 억지스럽다. 특히 인류 기원설은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고도화된 문명을 이루던 인류가 AI의 반란으로 멸망하고, 자신들의 DNA를 행성으로 위장한 우주선에 실어 광활한 우주로 보내 다른 은하계에서 다시 인류 문명을 일으켰다는 설정은 그냥 상상력 부족이라 할만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를 보며 '그럴 듯 한 대.'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외계인의 인류 창조설을 믿고 있는 (완전히 믿는 것는 것은 아니고, 신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것보다 차라리 외계인이 창조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도 [문폴]의 인류 기원설은 억지 주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문폴]의 캐릭터는 [2012]에서 거의 대부분 참조한 듯 보인다. 주인공 3인방 중에서 우수꽝스러운 우주 덕후 K.C. 하우스맨(존 브래들리)는 [2012]의 찰리 프로스트(우디 해럴슨)를 참조한 캐릭터임에 분명해 보인다. K.C.와 찰리는 똑같이 사회 부적응자이며, 음모론 신봉자이고, 인류의 종말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냈다. 브라이언은 [2012]의 잭슨 커티스(존 쿠삭)과 굉장히 비슷하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지금은 처참히 망가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과 아내와 이혼해서 아이들과 떨어져서 살고 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니의 계부 톰은 [2012]에서 온갖 고생은 다 해놓고 결국엔 허무하게 죽는 고든(토마스 매카시)를 연상시킨다. 동화에서 계모는 언제나 악당이듯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재난 영화에서 계부는 언제나 고생만 하다가 죽을 운명인가 보다.

영화 후반 K.C.가 브라이언 대신 희생하는 장면에서는 감동을 방해했다. 자고로 희생이라 함은 가장 멋진 캐릭터가 해야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다. 마이클 베이 감독이 [아마겟돈]에서 괜히 해리 스탬퍼(브루스 윌리스)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해리가 희생되어야 관객이 감동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테니까. 그와는 달리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가장 코믹한 캐릭터인 K.C.를 희생의 대상으로 선택함으로써 감동적인 순간마저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모두에게 비웃음만 당하던 비주류에 불과한 K.C.를 영웅화했다는 의미는 부여할 수 있었지만 감동의 순간 눈물을 흘리려고 준비하던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중국 자본만 더 끌어들인다면 2편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 시작 전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중국 제작사인 화이 브라더스의 이름이 나왔다. 사실 새롭지는 않다. 중국 자본이 할리우드 침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 자본이 영화에 투자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 자본이 투자된 티를 꼭 팍팍 낸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의 중국인 유모 미셀이라는 캐릭터이다. 조가 남편과 이혼 후 혼자 어린 딸을 키운다는 설정이기에 어린 딸을 봐주는 유모의 등장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유모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면서 어색함이 느껴졌다. 특히 영화 후반부 미셀이 소니를 구하는 장면에서는 '제발 정도껏 해라.'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미셀의 비정상적인 활약에 비한다면 우주 착륙선에 중국의 기술력이 무상으로 제공되었다고 여러 번 강조되는 장면은 애교에 불과할 정도이다.

[문폴]은 2편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다. 영웅적인 희생을 선택한 K.C.는 인간에 우호적인 달의 AI에 의해 스캔 되어 달의 운영 체제와 한 몸이 된다.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며 달을 지구에 추락시키려 했던 멍청한(?) AI 나노 로봇의 본진도 아직 멀쩡하다. 자신의 창조주인 인류에 뭔 원한이 있어서 머나먼 은하계 너머까지 쫓아와 해코지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집념이라면 더 많은 AI 나노 로봇이 또다시 지구를 침략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염두에 둔 것인지 브라이언은 결의에 참 표정으로 '이건 시작에 불과해.'라고 지껄인다.

영화를 너무나도 실망스럽게 본 아들은 '설마 2편은 없겠죠?'라고 내게 묻는다. 북미 박스오피스 성적만 본다면 당연히 2편이 만들어질 리가 없어 보이지만 중국에서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적은 가능성으로 2편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미셀과 소니는 사랑에 빠져 SF, 재난에 청춘 멜로가 추가될지도 모르고, 달의 AI와 한 몸이 된 K.C.의 도움으로 인류는 나노 AI에 대한 방어 체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인디펜던스 데이 : 리써전스]를 자기 복제하려 할 것이다. 물론 나노 AI 군대를 막을 지구 방어군에 영웅적인 중국인 대원들이 다수 포함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편이 나온다면 또 보게 될지도... 물론 그땐 극장이 아닌 OTT 관람을 좀 더 강력하게 검토할 것이다. 이렇게 호기심이라는 것이 무섭다. 망작임을 알면서도 굳이 극장에서 [문폴]을 본 것처럼, 나는 호기심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물론 2편이 안 만들어진다면 그런 실수는 없을 테니 2편이 안 만들어지기를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