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칼럼(대중문화) - 여성포털이지데이

나는 지금이 혐오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세대 간의 혐오, 이성 간의 혐오, 계층 간의 혐오, 그리고 인종 간의 혐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다양한 혐오가 넘쳐 난다. 1960년대 인종 차별과 야만적 폭력을 겪으며 투쟁했던 사람들은 60년 후의 미래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악의만 달려졌을 뿐,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60년 후, 혐오의 시대를 넘으면 또 어떤 악의가 우리를 집어삼킬까? 씁쓸하다. 1960년대 차별과 폭력 속에서 스타의 삶을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리스펙트] - 사회적 약자인 흑인 여성이 소울의 여왕이 되기까지...

감독 : 리슬 타미

주연 : 제니퍼 허드슨, 포레스트 휘태커, 말론 웨이언스

대형 교회의 목사 클라렌스 프랭클린(포레스트 휘태커)의 딸로 태어난 아레사(제니퍼 허드슨)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린 시절 당한 성폭력과 임신으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었고, 꿈에도 그리던 가수로 데뷔하지만 히트작 하나 없는 별 볼일 없는 가수로 전락한다. 그녀가 가수로서 한 단계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테드(말론 웨이언스)와 사랑에 빠지면서부터이다. 테드 덕분에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던 아레사. 하지만 그녀의 명성이 높아지자 테드 역시 점점 강압적으로 변해 가고, 아레사는 결국 테드를 떠나 보낸다. 그러던 중 아레사에게 있어서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 사건이 터지면서 아레사는 술에 의존하며 슬럼프에 빠진다. 하지만 스스로 역경을 이겨내며 소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팝에 관심이 없는 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영화를 보기 전 아레사 프랭클린에 대해 알아보니 18번의 그래미 수상과 여성 가수로는 최초로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 축가를 부르는 등 국민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은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라고 한다. 타임지 선정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과 롤링스톤지 선정 '역대 가장 위대한 가수 10인'에 이름을 올렸다고 하니, 암튼 굉장한 가수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사실 나는 아레사 프랭클린보다는 제니퍼 허드슨의 이름을 보고 [리스펙트]를 선택했다. 내가 제니퍼 허드슨의 이름을 눈여겨본 것은 2007년 국내 개봉작인 [드림걸즈]에서였다. 이 영화는 주연을 맡은 비욘세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지만, 제니퍼 허드슨의 이름 또한 내게 깊이 각인되었다. 이후 그녀의 이름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2019년 연말 [캣츠]를 통해 다시 만났는데, 영화의 만듦새와는 별도로 제니퍼 허드슨의 폭발적인 가창력은 여전했다. [리스펙트]는 [드림걸즈], [캣츠]에 이어 제니퍼 허드슨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영화였기에 망설임없이 이 영화를 기대작으로 선정할 수가 있었다.

일단 [리스펙트]는 원했던 것을 실컷 얻은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 영화에 원했던 것이 제니퍼 허드슨의 노래였고, 그러한 내 기대를 알고 있는 듯 [리스펙트]는 2시간 2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제니퍼 허드슨의 노래를 맘껏 들려준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들이 전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며, 아레사 프랭클린의 대표곡이라고 하는 ' Respect'가 흘러나올 때도 별 감흥이 없었으니... 이 영화를 재미있게 즐기려면 흑인 소울 음악을 어느 정도는 좋아해야 할 듯싶다.

[리스펙트]는 아레사가 아버지, 남편,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강압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는지 보여 준다. 처음 그녀는 대형 교회의 목사이며, 흑인 인권 운동가인 그녀의 아버지 클라렌스의 결정에 무조건 따른다. 영화의 첫 장면, 곤히 잠든 어린 아레사에게 나와서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는 클라렌스의 장면이 그러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클라렌스는 다시 자라며 아레사를 올려 보낸다. 아레사는 클라렌스가 노래를 부르라면 부르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 못 부르는 인형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레사는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가수가 되고 나서는 클라렌스의 역할을 남편인 테드가 대신한다. 아레사의 모든 스케줄을 자기 맘대로 정하고, 마음에 안 들면 폭력을 휘두르는 그는 클라렌스와 더불어 1960년대 가부장적인 남성 캐릭터이다. 처음엔 테드를 이용해서 클라렌스에게 독립한 아레사는 테드로부터의 독립은 스스로 쟁취함으로써 한 사람의 당당한 성인으로써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 이후 술에 의존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렸던 아레사는 그것마저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전설을 완성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리스펙트]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리슬 타미 감독은 너무 무감각하게 아레사의 일생을 나열한다. 그녀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역경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 아레사가 무너졌을 때, '왜 저래?'라는 생각만 든다. 2시간 25분. 결코 짧은 러닝타임이 아닌데, 최소한 나에겐 아레사의 고난과 아픔을 공감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1960년대, 흑인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펙트]는 흑인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겪어야 할 고난을 제대로 그려내려 하지 않고 수박 겉핥기로 대충 넘어간다. 상황이 그러하니 [리스펙트]가 끝나고 내게 남은 것은 '제니퍼 허드슨은 여전히 노래를 잘 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다.

[세버그] - 부당한 권력의 폭력에 당당하게 맞섰던 여배우의 신념

감독 : 베네딕트 앤드류스

주연 : 크리스틴 스튜어트, 안소니 마키, 잭 오코넬

1960년대, 할리우드와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 진 세버그(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흑인 인권 운동가 하킴 자말(안소니 마키)을 통해 후원금을 내는 등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흑인 인권 운동이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반사회적 활동이라며 감시하던 FBI는 유명 여배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요원 칼 코왈스키(빈스 본)와 잭 솔로몬(잭 오코넬)을 투입, 진 세버그를 24시간 도청, 감시할 것을 지시한다. 그렇게 도청한 자료를 토대로 진 세버그와 하킴 자말의 불륜, 진 세버그의 임신 등의 정보를 언론에 흘려 진 세버그의 명성을 망가뜨린다. 자신이 24시간 감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진 세버그는 두려움에 떨지만, 결국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신념을 실현해 나간다.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실화를 다룬 [스펜서]로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떠올랐다. 2008년 [트와일라잇]으로 스타의 자리에 오른 그녀로서는 12년 만에 연기력까지도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버그]는 [스펜서]와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실존 인물을 연기했다는 점이 서로 닮았는데, 어쩌면 2019년 [세버그]로 연기력 시동을 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2021년 [스펜서]로 연기력의 결실을 맺은 것일지도...

진 세버그... 우리에겐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인 [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79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정말 그녀는 자살한 것이 맞을까? [세버그]가 개봉하기 며칠 전 MBC TV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진 세버그의 자살에 대한 음모론이 방영되었었다. 그걸 보면서 '설마... 정말 그랬으려고...'하며 인상 깊게 본 기억이 나기에 [세버그]에서 진 세버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세버그]는 아직은 음모론에 불과한 진 세버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녀가 하킴 자말을 만나 흑인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하여 FBI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상황을 영화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그려 놓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진 세버그가 자신에게 양심선언을 한 FBI 요원 잭 솔로몬 앞에서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의 의지가 결코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딱 거기까지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봤던 그녀의 의문 가득한 죽음에 대해서는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자막으로 짧게 언급할 뿐이다. 전기 영화인 [세버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진 세버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에 흥미를 느끼고 영화를 선택한 내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버그]는 내게 꽤 흥미로운 영화였다. 특히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발군의 연기력이 눈에 띈다. 사실 그녀는 2012년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촬영 당시 감독인 루퍼트 샌더스와 불륜 스캔들에 휘말리며 배우 경력에서 치명타를 맞았었다. 그런 면에서 하킴 자말과의 불륜으로 위기를 맞이한 진 세버그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를 잘 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세버그]에서는 그녀의 연기가 빛을 발했다. 뭔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는 당당한 여배우에서 FBI의 감시로 점점 무너져 가는 진 세버그의 내면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세버그]를 보고 나니 [세버그]보다 더욱 진일보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를 보기 위해 이번 주에 개봉했지만 극장 관람을 주저하고 있었던 [스펜서]가 보고 싶어졌을 정도이다.

1960년대 시대적 상황도 이 영화가 흥미로웠던 이유이다. 흑인 인권 운동이 본격화된 1960년대 미국은 최근 들어서 수많은 영화들이 앞다퉈 그려내고 있는 한마디로 핫한 소재이다.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남우조연상(다니엘 칼루야)과 주제가상을 수상한 샤카 킹 감독의 [유다 그리고 블랙 매시아], 그리고 역시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아론 소킨 감독의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 바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에 본 [리스펙트]의 주요 배경도 1960년대이다. 인종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시절, 기득권인 백인 남성들은 흑인의 인권 운동이 자신의 이익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고, 흑인 인권 운동을 막는 것이 애국이라 포장했다.

영화 초반 잭 솔로몬이 애지중지하는 것이 '캡틴 아메리카' 마블 코믹북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캡틴 아메리카'는 백인 슈퍼 히어로의 대명사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그는 백인의 권익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았다. 인종은 정의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아닌 것이다. 잭 솔로몬도 진 세버그를 통해 뒤늦게 그것을 깨닫는다. MCU에서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에 이어 2대 '캡틴 아메리카'로 지목된 샘 윌슨을 견기한 안소니 마키가 흑인 인권 운동가인 하킴 자말로 출연한 것이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세버그]는 진 세버그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담아내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영화적 재미는 일정 부분 포기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꽤 괜찮은 전기 영화로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