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 배우가 왜 이런 영화에?라는 의문이 드는 영화가 있다. 네임밸류가 제법 있는 배우들의 조합인데, 만들어진 결과물은 엉뚱한 B급 영화인 경우이다. 뭐 가끔은 그런 영화도 몰아서 보는 맛이 있다. 결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댄 스티븐스, 아일라 피셔, 레슬리 만, 주디 덴치가 출연한 [블라이스 스피릿]과 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구드, 릴리 로즈 멜로디 뎁이 출연한 [사일런트 나이트]가 바로 그런 영화이다. 잘 빠진 할리우드 상업 영화를 기대하지 말고 본다면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낄지도...
[블라이스 스피릿] - 죽은 자와 산 자의 삼각관계, 그 끝은?
감독 : 에드워드 홀
주연 : 댄 스티븐스, 아일라 피셔, 레슬리 만, 주디 덴치
뮤즈였던 전처 엘비라(레슬리 만)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슬럼프에 빠진 작가 찰스(댄 스티븐스)는 영감을 얻기 위해 아내 루스(아일라 피셔)와 함께 심령 술사 마담 아카티(주디 덴치)를 찾아가 강령회를 제안한다. 마담 아카키의 진지한 퍼포먼스가 벌어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그날의 강령회는 해프닝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날 밤 찰스 앞에 죽은 엘비라의 영혼이 나타나며 반전이 일어난다. 엘바라 덕분에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된 찰스. 하지만 엘비라는 찰스를 소유하기 위해 찰스를 죽이려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면서 그들의 삼각관계는 심각한 단계에 접어든다. 결국 루스는 또다시 마담 아카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엘비라를 다시 저승을 보내려던 계획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만 가는데...
[블라이스 스피릿]의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2년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가 떠올랐다. 브루스 윌리스, 메릴 스트립, 골디 혼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주연을 맡은 이 코미디 영화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묘약을 마신 두 여성과 그들 사이에 낀 한 남성의 묘한 삼각관계를 통해 공포 코미디의 잘 짜인 영화적 재미를 선사했던 영화이다. 계단에서 떨어져 목이 비틀어지고, 총에 맞아 배에 구멍이 뚫려도 결코 죽지 않는 헬렌(골디 혼)과 매들린(메릴 스트립)의 섬뜩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인 영화였다.
확실히 [블라이스 스피릿]는 [죽어야 사는 여자]과 분명 비슷하다. [죽어야 사는 여자]와 [블라이스 스피릿]의 가장 큰 공통점은 캐릭터 구성이다. [죽어야 사는 여자]는 닥터 멘빌(브루스 윌리스)를 차지하기 위한 헬렌과 매들린의 애정 다툼이 주요 내용이다. [블라이스 스피릿] 또한 찰스를 사이에 둔 죽은 전처 엘비라와 살아 있는 현처 루스의 애정 다툼을 다루고 있다.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 헬렌과 매들린에게 죽지 않는 묘약을 주는 신비의 여성(이사벨라 로셀리니)이 등장하는데, 이는 [블라이스 스피릿]의 심령 술사 마담 아카티와 비슷하다. 이 캐릭터는 모두 사건의 원흉이기도 하다. 공포 코미디라는 영화의 장르, 의식적으로 과장된 배우들의 연기까지... 30년 전 즐겁게 봤던 [죽어야 사는 여자]의 재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어서 [블라이스 스피릿]은 내게 나름 만족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블라이스 스피릿]의 재미가 [죽어야 사는 여자]의 재미에 미치지는 못한다. 일단 그로테스크한 공포가 [블라이스 스피릿]에는 결여되어 있다. 죽은 엘비라의 영혼이 찰스 앞에 나타날 때 섬뜩한 모습이길 기대했다. 엘비라는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엘비라가 찰스의 집 하녀들을 내쫓는 장면 등 영화는 충분히 공포 코미디 장르의 재미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블라이스 스피릿]은 코미디만 살려 놓고, 공포는 아예 포기해 버린다. 공포 영화를 보지 못하는 겁이 많은 내가 이런 아쉬움을 느낄 줄이야...
찰스를 차지하기 위해 오히려 찰스를 죽이려는 엘비라의 음모도 너무 대충 그려졌다. 찰스를 너무 사랑하지만 자신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루스와 찰스를 나눠 가져야 했던 엘비라는 찰스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려 한다. 이러한 엘비라의 음모가 좀 더 치밀하게 그려졌다면, 엘비라의 음모에 휘말려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는 루스의 장면이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영화는 너무 코미디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영화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긴장감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관객을 웃길 수도 있었을 텐데, 에드워드 홀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에만 집중을 한다.
확실히 [블라이스 스피릿]은 그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문제는 그것뿐이라는 점이다. 분명 그 이상을 줄 수도 있는 영화였는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처음부터 그 이상을 거부해 버린다. 유령이 되어 찰스 앞에 나타난 엘비라를 통해 섬뜩함을 안겨줄 수도 있었고, 찰스를 죽이려는 엘비라의 음모를 통해 긴장감도 안겨줄 수 있었는데, 그냥 가벼운 웃음만을 추구해 버린다. 그것이 [블라이스 스피릿]과 [죽어야 사는 여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고, [블라이스 스피릿]이 [죽어야 사는 여자]보다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일런트 나이트] - 인류 멸망의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며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감독 : 카밀 그리핀
주연 : 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구드, 로만 그리핀 데이비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넬(키이라 나이틀리)과 사이먼(매튜 구드) 부부의 초대로 오랜 동창들과 그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다. 그들의 관계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서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지만, 오늘만큼은 서로 다투지 않고 용서와 사랑으로 함께 하자고 약속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면 정부에서 나눠준 약을 먹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환경 오염으로 거대한 독가스 폭풍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독가스에 노출되면 온몸에 피를 흘리며 괴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는 편안한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넬과 사이먼의 아들인 아트(로만 그리핀 데이비드)가 약을 먹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마지막 크리스마스 파티는 긴장감에 휩싸인다. 과연 그들은 원하는 대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오늘 개봉하는 [문폴]의 예고편을 보더니 아내가 '또 인류 멸망이야?'라며 지겹다는 표정을 짓는다. 맞다. 또 인류 멸망이다. 운석이 떨어지고, 외계인이 침공하고,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좀비가 나타나고, 방법은 많다. [사일런트 나이트]도 인류 멸망을 이야기한다. 이번엔 독가스 방출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오염을 견디지 못한 지구가 자체적으로 거대한 독가스 폭풍을 발생시킨 것이다. 피할 방법은 없다. 독가스는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전 지구적으로 발생할 것이며, 산소를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공기 중에 살포되는 독가스로부터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니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살아남으려는 몸부림보다는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주말에 아들과 [문폴]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아들이 [문폴]을 보러 가는 이유는 도대체 이번 위기를 영화에서는 어떻게 막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들이 생각하기에 달과 지구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인류 멸망을 불러올 텐데, [문폴]은 영웅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인류 멸망을 막고 희망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인류 멸망에 대한 할리우드의 방식이다. 어떤 억지를 부려서라도 인류 멸망의 재앙을 막아내는 것. 그와는 달리 [사일런트 나이트]는 인류 멸망을 막을 생각조차 없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방점을 찍는다. 어떻게 인류 멸망까지의 시간을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졌던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2013년 국내 개봉작 [세상의 끝까지 21일]과 약간 비슷하다.
희망은 없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인류 멸망에 대한 캐릭터들의 태도는 차분하다. 물론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래도 처음엔 괜찮은 척하며 즐겁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긴다. [사일런트 나이트]는 그렇게 죽음을 하루 앞둔 인간들이 괜찮은 척하며 파티를 즐기는 장면을 통해 씁쓸한 웃음을 안겨준다. 영화에서 2010년 국내 개봉작인 [더 로드]가 언급되는 장면에서 나 역시 빵 터졌다. 인류 멸망의 순간 어렵게 살아남았더라도 [더 로드]와 같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냐는 대사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더 로드]는 아포칼립스를 그린 영화 중 최악으로 끔찍한 영화이다.
편안한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임신을 한 소피(릴리 로즈 멜로디 뎁)는 자신의 손으로 뱃속 아기를 죽일 수는 없다며 자살 약을 거부한다. 아트도 자살 약을 거부한다. 아트는 넬과 사이먼의 선택에 반항한다. 왜 어른들은 아무도 희망을 가지지 않는지 의문을 가진다. 결국 유일하게 자살 약을 먹지 않고 독가스에 노출되어 피를 흘리며 괴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반전은 있다. 영화를 끝까지 눈여겨보길...)
[사일런트 나이트]는 국내 개봉이 무산되어 OTT에서 공개되었다. 사실 그럴만하다. 코미디라고 하기엔 그다지 웃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류 멸망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갖추고 있어야 할 스펙터클은 당연히 없고, 희망에 찬 영웅적인 이야기도 없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한정된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추며 웃고 떠드는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꽤 많은 생각이 났다. 내가 만약 저 상황이라면... 나는 편안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감수하며 그래도 있을지도 모를 희망에 배팅할 것인가? 아직까지 독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버텨주고 있는 지구에 감사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