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는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있다. 대학원 진학, 종합건설회사로의 취직, 일반 개인 설계사무소로의 취직..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사무소에 지원서를 보낸다. 물론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는 채용공고를 내지 않았다.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노건축가인 무라이 슌스케는 몇년째 새로운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있었고, 사카니시 도오루처럼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지원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사카니시 도오루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원을 했고, 몇일 후 채용예정은 없지만 무라이 슌스케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무라이 슌스케와 대면하여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휠체어 타는 식구가 있는 가족을 위한 집 설계 플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설계에 대한 대화를 나눈 몇일 후, 사카니시 도오루는 임시채용이 되었고, 다시 얼마 후 정식채용이 된다. 뜻밖의 기적과도 같은 기회를 얻은 사카니시 도오루. 그는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만들어내는 노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뒤를 따르며 배우고 또 배운다.
이야기는 큰 굴곡이 없이 담담하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게되는 매력을 지녔다. 다 읽고나니 '아, 멋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힐링이 되는 느낌이랄까? 스피드 있게 진행되거나 반전이 있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자꾸 책장이 넘어갔다. 아마도 작가의 언어적 표현들 때문인 것 같다. 막힘없이 읽히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고, 섬세한 묘사가 이야기에 표정을 불어넣고 있었다. 읽고 있는 동안 사카니시 도오루를 따라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의 여름 별장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었다. 표지 문구 그대로 데뷔작이라는 것이 놀랍다. 어느새 사카니시 도오루에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무라이 슌스케의 철학과 그의 건축에 대한 열정에 감탄하고 있었다. 자연과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용자에 맞는 건물을 설계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무라이 슌스케는 누구나 존경할만한 인물이었으니까. 사생활에서는 약간 실망했지만 말이다.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는 여름이면 온 사무실이 가루이자와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옮겨간다. 좀더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번 여름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위한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본래 무라이 슌스케는 경합을 전제로 하는 공공 건축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오랜 지인인 문부장관의 부탁으로 특별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배경 덕분에 사카니시 도오루가 채용이 된 것이기도 했고.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간만의 경합 참여로 사무실은 약간 들뜨고 열정 가득한 분위기가 되었다. 알고보면 작은 일 하나도 모두 이유가 있었고, 그것을 깨달은 사카니시 도오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무실에 적응을 해나간다. 그러다.. 경합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쓰러진 무라이 슌스케가 결국 사무실로 복귀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설계 사무소는 무라이 슌스케의 지시에 따라 서서히 정리에 들어가게 된다. 무라이 슌스케의 곁에 머물 수 있었던 시간은 1년 남짓이었지만, 사카니시 도오루는 그 기간 그에게 배운 것들을 잊지 않는다.
문장을 음미하듯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꼭 실화처럼 느껴진다. 책을 다 읽었을 땐 은은한 감동으로 가슴이 채워져 있었다. 다시 읽어도 똑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