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다보니 모임과 회식 약속이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요즘 회사일도 어찌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_- 덕분에 책 읽을 시간은 반의 반으로 뚝 떨어졌다. 신년회까지 끝나고 나야 제 속도를 찾을 수 있을 듯한 느낌; ^^; 암튼, 표지부터 강렬한 호기심을 이끌어낸 '13월'. 은근 소름돋게 만든 작가의 말도 호기심을 키웠다.
문명화와 기계화로 인한 편의가 사실은 내 모든 것을 내보이는 것과 같다고 봐야한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이 말은 계속되는 문명의 발전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데 크게 기여하겠지만, 발전되는 만큼 내가 노출되는 강도 역시 더 높아진다는 얘기 아닌가.. 곳곳에 퍼져있는 cctv로 인해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가 노출되고 있는 현실이고, 이러한 내용의 영화들도 현재까지 꽤 여러편 상영되었던터라 더 오싹함이 느껴졌다. 과연.. 책의 내용은 대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자신이 실험용 쥐처럼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된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너무 궁금해졌다. 책은 관찰자 수인과 그의 관찰대상인 재황(수인은 그를 자신만의 애칭인 밥이라 칭한다.)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1988년 9월 17일, 서울의 한 조리원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화재가 진압된 후 조리원에서 한 구의 산모 시체가 발견되고, 아이의 시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산모가 아닌 보호자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신문의 사회면 하단에 짧게 몇 줄 언급되었을 뿐, 조용히 잊혀졌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2012년, 수인은 1년째 자신의 관찰대상인 밥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관찰된 내용을 매일 수기로 '관찰일지'를 작성해 사무실로 보낸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정부 산하 기관으로 비밀 부서에 속했다. 전임자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은 후 밥을 관찰해왔는데, 1,232주째의 관찰기록이 넘어갔으니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밥이 관찰되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식기를 통해 밥이 언제 움직이고 언제 어디로 이동하는지 파악한지 10개월이 넘었을 무렵, 관찰자의 삶에 보통의 일상 같은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심각하게 그만둘 것을 고민했다. 그러다 11개월쯤 부턴 무인도에 살고 있는 듯한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밥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시간이 정해지는 탓에 대학생인 연하의 애인 도영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5년만에 간신히 잡은 직장인데다, 수인이 아는 한 정신병력(강박증과 관음증)을 지닌 여자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연하의 애인 만나겠다고 계약직이지만 높은 연봉의 공무원으로 정규직의 가능성도 열려있는 직장을 놓칠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 밥의 동선에 변화가 생겼기에 더욱 면밀하게 그를 관찰해야 한다.
옆구리가 군데군데 해진 싸구려 운동화에 상표도 없는 회색의 라운드 티셔츠, 거기에 빛 바랜 카키색 바지를 입은 재황지만, 거리의 그 누구보다 빛이 났다. 지나가는 여성들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을 만큼. 주머니에 있던 몇개의 동전과 불투명한 미래를 생각하던 재황의 발길은 어느새 '배가본드 pc방'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한 건물에 멈췄다. 그곳은 재황의 어릴적 친구이자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광모가 있는 곳으로 pc방의 간판을 달고 있지만, 성접대를 알선하는 곳이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고아원 시절의 친구들과 다시는 연락도 만나지도 않으려고 했던 재황이지만 팍팍한 삶은 재황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게된 광모에게서 진짜 여대생이 필요하다며 돈이 필요해보이는 여대생들에게 명함을 돌리는 대가로 지금 하고 있는 알바비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얘기를 듣는다.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돈과 명함이 든 쇼핑백을 들고 나온 재황. 하지만 차마 대놓고 돌리지는 못하고 돈이 절실해보이는 여대생들의 책이나 도서관의 책 속에 명함을 꽂아두는 걸로 대신했다. 발견하는 여대생이 광모에게 연락을 하냐 안하냐는 그 여대생의 선택이니 자신은 잘못하지 않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어릴적 친구 광모를 만나면서 급격하게 변하는 재황과 그런 그를 관찰하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수인. 그리고.. 우연히 시작된 자신의 뿌리찾기에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모두 뒤흔들만한 경악스럽고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일은 관찰자였던 수인에게도 일어난다. 결국.. 모두가 재황(미로 속 쥐) 혹은 수인(관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일까? 중후반까지는 괜찮았는데, 마지막 결말로 다가갈수록 살짝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자신의 삶이 지금껏 한마리의 실험용 쥐처럼 취급되어왔다는 것과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알게되는 것으로 끝나다니.. 물론 광모와 재황 두 사람만으로 몇십년을 이어온 일이 쉽게 무너지진 않겠지만, 크게 흔들어놓을만한 일조차 벌어지지 않았다는 게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