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여우비. 구로사와(黑澤)라는 문패가 보이는 집 앞에서 5살 된 구로사와가 서 있다. 하지만 오늘은 햇빛이 나는데도 비가 오고 있다. 어머니는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서 여우비가 내리는 거라면서 그 모습을 보면 안 된다고 가르쳐준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충고를 잊고는 숲으로 들어가서 여우가 시집가는 행렬을 숨어서 숨죽여 본다. 집에 돌아온 아이가 이 사실을 말하자, 어머니는 여우가 용서하지 않으면 할복자살해야 한다며 칼을 쥐어준다. 아이는 다시 숲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아이 앞에 있는 것은 비온 뒤 무지개가 뜬 아름다운 산뿐이다.

제2편 복숭아밭. 어린 구로사와는 누나들과 함께 밭으로 복숭아를 따 먹으러 간다. 하지만 복숭아밭은 이미 그의 가족들이 모두 베어버린 후였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이상하게도 자기에게만 보이는 어떤 소녀를 따라서 쫓아가는데, 소녀는 어느 순간엔가 사라지고 나무를 베어버린 자리엔 복숭아나무의 정령들이 다양한 색채의 일본 전통 복장을 입은 채 어린 구로사와에게 “복숭아나무를 왜 잘랐냐”면서 나무란다. 그리고선 천천히 춤을 추며 연주를 시작하는데, 그 가운데 복숭아 잎이 휘날리면서 정령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제3편 눈보라. 구로사와와 동료 3명은 눈보라가 치는 산 속에서 조난을 당한다. 그들은 캠프를 찾아 눈밭을 걷다가 지쳐 잠이 든다. 그때 구로사와 앞에 눈의 정령(雪女)이 나타나 그를 깨우고 “눈은 따뜻하고 얼음은 뜨겁다”며 용기를 북돋는다. 힘을 얻은 구로사와는 동료들을 깨워 결국 캠프로 향한다.

제4편 터널(The Tunnel). 시대는 대동아 전쟁 시절이다. 다 떨어진 군복을 입은 소좌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혼자 밖으로 나올 때 이상한 느낌을 받고는 멈춰 선다. 그때 터널 속에서 죽은 부하 한명의 혼령이 다가온다. 그 혼령은 자기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소좌는 "하지만 자네는 이미 죽었으니 자신이 속한 곳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다시 터널 안으로 혼령을 보낸다. 그러자 죽었던 자신의 소대원 전원이 대오를 지어서 도열하듯 다가온다. 소좌는 다시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서 터널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들이 사라진 뒤 어두운 터널의 입구 쪽으로 경례를 붙인다.

제5편 까마귀. 미술관에서 고호의 그림을 보던 구로사와는 그림 ‘아를르의 도개교’ 속으로 빠져 들어가 그림 속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호를 찾아간다. 구로사와는 귀를 자른 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노란 밀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호를 발견하고 말을 건내지만, 고호는 바쁘다면서 무심하게 가버린다. 구로사와는 고호를 쫓아 고호의 여러 그림들 속을 돌아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멈춰 서는데, 그때 그가 서 있던 곳에 있던 고호의 그림 속 풍경은 까마귀 떼가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고호를 만나는 장면에서의 노란 밀밭은 그 색감을 내기 위해 밀밭 전체를 노랗게 색칠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제6편 붉은 후지산(Mount Fuji In Red). 갑자기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해 후지산이 다시 활화산화 되고 용암이 무섭게 흘러내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루며 피난을 가고 있다. 피난 중의 사람들은 원자력발전소는 안전하다고 주장해온 당국을 비난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구로사와도 화산재와 섞인 붉은 연무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제7편 귀신이 울부짖는다(鬼哭: The Weeping Demon). 세상에 종말이 와서 모든 게 황폐화된 어느 곳에 생존하게 된 구로사와는 홀로 남겨져 있다. 식물들도 돌연변이가 되어 그 크기가 기형적으로 크다. 그는 또 비참한 몰골의 다른 생존자를 만나게 되는데, 지구의 멸망을 초래한 인류의 아둔함을 한탄하며 어떤 곳으로 안내한다.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과 같은 몰골로 곡소리를 내며 신음하고 있다. 구로사와는 겁에 질려 그곳에서부터 도망을 친다.

제8편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 구로사와는 여행을 하다가 물레방아가 있는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은 아직도 현대 문명을 거부한 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만난 마을의 103세의 노인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며, 자연을 잊고 문명의 발전만을 생각하는 인간을 훈계한다. 죽음의 순간이 가까이 온 이 노인은 죽음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믿기에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온 마을 사람들과 마을의 악대는 신명나는 연주를 하면서 노인의 죽음을 축복하며 노인의 뒤를 따른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작품 활동 끝자락에 있는 ‘꿈’은 말 그대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고, 일정한 흐름이 (약간은) 있기는 하지만 이전과 같은 짜임새 있는 흐름이 아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작품을 꾸미고 있다는 느낌의 작품이다.

어떠한 짜임새 있는 구성에 고심하기 보다는 머리에서 떠올려지는 이미지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것에 보다 고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미학적인 의미에서나 관심을 갖게 만드는 ‘꿈’은 전작인 ‘란’을 통해서 자신이 남겨두었던 모든 것들을 소진시킨 뒤에 남겨진 허전함을 꿈을 통한 이미지들로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지극히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져만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구로자와 아키라는 보다 더 큰 폭으로 현실로부터 거리감을 넓혀가고 있고, 대충 얽게만 맞추고 있는 단편들의 모음을 통해서 남기고자 하는 마지막 몇 마디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편의 단편들을 묶은 ‘꿈’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짧은 단잠과도 같은 느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동화와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 기이한 느낌의 분위기로 변화시키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눈보라 속의 조난으로 인해서 귀신을 만나게 되지만 결국 살아남게 되고, (이야기로서는 연결되지 않는) 네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는 살아남았지만 자신만이 살아남았을 뿐이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나타난 부하들에게 죽음을 받아들여 달라고 고통스럽게 부탁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구로자와 아키라는 고흐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고흐를 만나려고 하지만 고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을 뿐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그런 고흐를 쫓으려 하지만 고흐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그저 그의 작품들 속에서 길을 잃게 될 뿐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구로자와 아키라의 고민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이야기들을 내놓고 있는데, 어린 시절의 단꿈과 같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와는 반대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원폭 / 핵에 대한 불안과 공포, 과학 기술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임에 대해서 담아내고 있으며, 마지막 이야기를 통해서 이와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단꿈과 같은 초반과 젊은 시절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것 같은 중반 그리고 중년의 공포로 가득한 느낌이 드는 후반과 말년의 안식을 찾는 듯한 마지막 이야기 까지 삶을 살아가며 갖게 되는 감정을 꿈을 통해서 나열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게 되는 ‘꿈’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개인적인 꿈과 기억 그리고 공포와 불안감을 겹치고 있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에서 긍정과 낙관을 모색한다.

나른한 기분을 갖게 하는 마지막 이야기는 특히나 그가 꿈꾸는 사회 혹은 이상향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 세계는 생태주의 혹은 자연주의에 기울어져 있으며 농촌 공동체 적인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가 제시하는 이상향에 가까운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상적 사회는 어쩐지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가 제시하던 이상향과 유사한 경향이 언뜻 보이고 있어서(특히나 ‘미래소년 코난’과 같은 작품을 떠올리면 상당히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조금은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의 걸작들을 떠올린다면 어쩐지 초라한 느낌도 들게 되기는 하지만 말년의 구로자와 아키라가 갖고 있는 추억과 기억 그리고 근심과 고민들을 겹쳐놓고 솔직하게 영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부족함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