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종점에서 내려서자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구례 여행길을 맞이하는 봄비였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죄로 우산 대신 외투에 달린 모자 깊게 눌러쓰고 상위마을을 향해 걷는다. 처음에는 같은 방향으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걸었는데, 중간 즈음 가서 주위를 살피니 남은 것은 혼자뿐이었다. 중동에서 상위마을 향하는 길에 여럿 산수유 예쁘게 핀 마을이 있더니 다들 그곳에 걸음을 멈추었는가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숨이 슬슬 차오를 때쯤 왼쪽에 네모난 돌로 다듬어진 산책길을 걷는다. 돌과 돌 사이에 제법 간격이 있어 걸음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연히 속도가 느려지고 가팔라진 숨이 진정될 때 마지막으로 나무로 만든 계단과 이어졌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돌아본 뒤편엔 산수유 꽃대궐이 화려하여 가던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감상하다 사람 물결 속을 유유히 헤치며 상위마을 산수유 지천을 헤매었다. 어느새 가늘던 빗줄기는 딱 끊기고 대신 촉촉함만이 가득 남았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 유유히 걸으며 단정하게 쌓인 돌담길에 늘어진 산수유 꽃길을 걷는다. 정겨운 이끼 낀 둥근 담 돌엔 가득 물기도 묻어나고, 짙어진 흙길은 살포시 족적이 남았다.

돌담길에서 우측으로 걸어 나무데크 길을 잠시 걷다 무성한 산수유나무 아래 고개 숙여 넘어가 개천 하나 건너 사람들과 반대로 걷는 걸음에 노랗게 흐드러진 산수유 물결 너머로 구름이 수북이 내려앉은 지리산의 자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비가 와서 좋은 것은 그토록 높다란 구름이 이렇게 지상에 내려오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산수유 따라 걷다 산수유 열매며, 엑기스, 산수유 차를 파는 할머니에게 산수유 엑기스 한 병을 샀다. 어디 여행가서 이런거 쉽게 사지 않는데 얼마전 읽었던 <구례를 걷다>에서 산수유 열매를 따서 자식들 공부에 사는데에 보탬이나 하려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여운처럼 남아 있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왕 물건도 하나 샀으니 할머니와도 말을 주고 받으며 산수유 열매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노란 꽃을 피우는 산수유가 어쩜 이다지도 붉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어린 아들이 아파 추운 겨울에 열매를 따다준 아비의 마음도 이처럼 붉은 사랑이었을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애달픈 내리사랑이라 그 노랗게 피던 꽃이 붉게 알알이 맺히는가도 싶다.

아직 덜 피어난 매화는 산수유와 어우러져 더 하얗게 빛이 나고, 노란 수레는 산수유와 동색이라 친구 같다. 새하얀 안개꽃이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장미꽃과 어우러졌을 때 더 빛을 발하듯, 노란 산수유도 무언가 어울릴 때 한층 그 미가 깊어짐이 자연히 산수유를 보며 안개꽃을 떠오르게 만든다. 사람이 홀로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함께 어울릴 때 더 아름다울 수 있음과 또 같지 않은가.

버스 시간에 맞춰 정류장을 찾아 나서는 길에 안내원께 여쭈니 본인도 모른다며 내려가는 길에 있는 정류장일거라 말한다. 그 말을 들으니 아니 걸을 수 없어 하염없이 걷다 하위마을 버스정류장까지 이르렀다. 홀로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그쳤던 비가 다시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고, 멀거니 비를 보며 두런두런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수유 마을 이야기며, 이천에서 묘목이나 산수유 열매를 사온다는 말씀이며, 계척마을에 오래된 산수유가 많다는 것과 다음번엔 계척마을에서 시작하여 현천마을을 들렀다가 남원으로 가라는 주옥같은 말씀도 해주셨다.

함께 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여행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복이다.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해 구례터미널까지 가는 차비를 내고 할머니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마침 3, 8일 열리는 구례 오일장을 가신다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려고 마음먹고 터미널에서 미리 버스표를 구매하고 가야지 생각한 터였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그 할머니를 중간에 내려드리고, 마침내 종점이 터미널에 도착해 바쁘게 버스에서 내려 매표소로 향했다.

서울로 가는 마지막 버스 좌석을 물어보며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오늘 올라가는 모든 버스표가 매진이라는 말에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직원이 광주로 가는 버스를 당장 타는 것을 추천한다는 말에 오일장에 대한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바로 광주행 버스를 끊었다. 이튿날 홍콩으로의 여행이 예정되어 있던 내겐 다음날까지 지방에 있을 여유가 없었기에 택한 선택이었다.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서 꾸벅이며 졸다 도착하니 이곳에는 더욱 굵직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하게 온 광주행의 아쉬움을 이렇게 씻어 내리려는가 싶을 정도의 수량이었다. 버스표를 구매하려고 창구로 향하는데 온통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그 가운데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기다려 표를 물으니 당장은 표가 없고 2시간 반 후에나 일반 직행 버스표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마저도 다행이라며 서울행 표를 사고, 이른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버스에 올랐다.창문을 통해 흐르는 게 빗줄기인지 내 아쉬움의 흔적인지 모르겠으나 짧은 구례의 산수유 여행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다시는 주말에, 그리고 조급하게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며 망연히 부옇게 흐트러진 광주터미널을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