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의 매표소가 있는 영춘산문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자 사찰의 길목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통도사라고 하면 오로지 홍매화 하나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내 좁은 소견을 일깨워주는 큰 선물 같은 숲이었다.

꽃샘추위로 약간 낮아진 기온 덕에 외려 상쾌한 숨을 마실 수 있는 소나무 길을 걷는다는 건

시간에 쫓겨 조급해 하던 걸음에 여유를 주고, 넝쿨처럼 엉킨 마음을 살며시 풀어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숲길 옆쪽에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뜻을 할 수 없는 한자가 써진 바위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신라 선덕여왕 1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니 그 역사의 깊이야 따라올 수 없을 것이고

수없이 다녀간 명사들의 자취가 저렇듯 굳센 바위틈에 새기어졌나 싶다.

소나무 숲을 벗어나 주차장이 아닌 오른쪽 길로 빠져 조금 걸어가자 오른편에 수많은 사리탑이 새워져 있는 장소가 눈에 뜨였다.

오래도록 수련을 한 스님들이 열반에 오르면 몸에는 신비로운 사리가 남아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 사리탑이라고 했던가.

한 차례 둘러본 사리탑 일대는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산문 하나를 더 지나쳐 성보박물관은 외관만 살피고 일주문을 넘자 사찰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천왕문과 이어진다.

예전에 여동생이 이곳을 지나가면 무섭다고 울었던 적이 있었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고 서 있는 사천왕의 모습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천왕문은 어쩐지 절에 들리면 꼭 지나야 할 것 같은 관문이기도 했다.

천주교에 가면 고백성사 때 사소한 고민과 잘못이라도 털어놓듯, 세상의 번뇌와 어지러움은 이곳을 통과하며 벗어놓고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천왕문을 지나고 바로 눈에 뜨이는 것은 극락보전이다. 빛바랜 탱화와 색 바랜 단청으로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그 옆에는 두 그루 매화나무가 뭇 사진사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진분홍 매화와 연분홍 매화가 나란히 피어 있는데 그 자태가 자못 고아하다.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아 일단 되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더 마주하기로 하고 좀 더 경내 안쪽으로 걷는다.

영산전 뒤쪽으로 돌아 도착한 영각에도 매화가 활짝 피었다.

역시나 이곳에도 이미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어 슬그머니 카메라 들이대고 공연히 셔터만 눌러보고 용화전에 이르니

보물 제 471호라는 봉발탑이다. 말은 탑인데 발우라고 하며, 석가모니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 받는 것이라는 걸

상징하는 조형물이라고 한다. 용화전부터는 몇 개의 법당과 전각이 다닥다닥 이어진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과 국내 최초의 대장경을 봉안했고 현재도 고려대장경 1,2,3,4권이 보관되어 있는 해장보각,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신 개산 조당에 이르기까지.

그 몇 채의 건물을 두루 둘러보고 있자 때마침 해설사 한 분이 주변의 건물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덕분에 대웅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붕 처마 바로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연꽃 모양의 자기로 못으로 고정하여

보기 싫은 부분을 저렇게 애써 도자기로 감추어 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얼른 지붕을 올려보자 아니나 다를까, 마치 오므린 연꽃처럼 도자기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꽃살문을 살피는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게 있다.

꽃살문이라고 하여 온통 꽃만 있는 줄 알았더니 소나 사자 같은 동문들의 문양도 눈에 뜨이는 것 아닌가.

절에 가면 무심코 지나가기 쉬운 살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런 즐거움이 있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놓인 몇 개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졌다는 금강계단이다.

계단이란 계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를 말하는데, 이곳엔 부처님의 사리를 친견하고자 하는 참배객들이

탑돌이를 하며 안녕을 바라는 곳이기도 해 카메라 셔터 소리마저 너무 죄송스러울 만큼 경건하다.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명월료 앞 두 그루의 매화 앞에 섰다. 한국의 아름다움은 단아한 단청과 곡선의 미에 있다고 했던가.

그에 하나 더 통도사에는 고결하고 순결하게 피어나는 매화의 향이 있어 한층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