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히며, 선비의 꽃이라고 불렸던 만큼 매화는 고결, 순결, 소중한 추억, 귀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그 하얀 빛깔이 참으로 고결하고 순결해 보이기도 하고, 붉은 빛이 허공에 점점이 번진 모습이 옛적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하여 붙여진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퇴계 이황 선생과 기생 두향이의 사랑과 얽힌 소설 같이 귀한 사랑이야기 때문 아니겠는가.

마흔여덟에 충북단양군수로 부임해, 열여덟 꽃다운 관기 두향과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였고, 9개월 짧은 부임 후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될 때 두향은 따라 갈 수 없어 매화 화분 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임을 떠나보내며 그 구슬픈 시 하나 지었다 하고,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울제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찌할까 하노라

이후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편지로 종종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퇴계선생 가까이엔 사랑했던 두향의 매화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그 매화를 두향 보듯 사랑하였고 그림으로도 즐겨 그렸으니, 퇴계 선생 돌아가시며 마지막 말씀조차 매화에 물을 주어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하니 이 어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 매화 보려하자면 안동에나 가야 할 텐데 그러나 엉뚱하게 내 걸음은 양산 원동으로 향했다. 거제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이어지는 길로는 아무래도 양산만한 곳이 없는 탓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 기찻길 옆에 만발한 매화꽃의 사진이 우연히 눈에 들어온 탓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원동으로 가는 방법은 부산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원동역으로 가는 방법과 부산도시철도 2호선 양산역에서 원동․천태산 방면 버스를 타는 방법 두 가지로 나뉘는데 두 가지 모두 교통이 수월한 것은 아니라 시간을 잘 맞춰 갈 필요가 있다. 난 기차를 타고 원동역으로 가서 역 근처 순매원에서 매화를 보고, 원동에서 버스를 타고 양산시외버스터미널로 와서 통도사로 가는 코스를 잡아 부산역에서 9시 25분에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를 탔다. 원동역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30분. 사상역, 구포역, 화명역, 물금역을 거쳐 도착한 원동은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과 이웃하고 있는 작은 역이다. 내리는 손님도 몇 없고, 기다리는 손님은 더더군다나 별로 없는 역사의 역무원께 일단 양산으로 가는 버스 편을 먼저 수배해 놓고 다시 원동역 광장에서 물금방면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 계단을 오르자 매화나무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은 화단이 순매원 일 리는 없으니 좀 더 걸어봐야지 않을까 싶어 인도도 없는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200m 정도 걸어가자 마침내 완만한 언덕을 타고 매화나무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양산 원동의 그 유명한 순매원이던가. 겨울의 매운 추위로 예상보다 매화는 좀 덜 핀 듯싶지만 기찻길 옆에 고결하게 핀 매화의 자태만큼은 퇴색될 수 없는 듯하다. 어디로 내려가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 살피다 할머니 한 분이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시는 걸 보고 방향을 잡았다. 일단 좀 더 도로를 따라 걷다 시멘트 길과 만나 아래로 내려가니 아직은 덜 핀 매화나무 아래에 흙길과 만난다.

앞서 걷는 할머니께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었으나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계신 분 따라 잡기 버거워 일단 걸음을 멈추니 일대는 그야말로 꽃대궐이었다. 꽃샘추위로 바람이 불어 날이 추울 줄 알았으니 봄볕의 따사로움이 그 기세를 한풀 꺾었는지 더없이 나들이하기에도 좋은 날씨였고, 봄의 불청객이라는 황사도 없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희고, 붉은 매화가 참으로 곱다.

그러고 보니 매화는 또한 일지매의 상징이었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훔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던 의적이 한 가지 홍매화를 놓아두고 가니 그 이름이 일지매라 하였다.

“매화는 눈 속에 피어 추위에 떨고 어미는 어려서 되어 이별에 우네.”

일지매의 탄생의 슬픈 이야기까지 곁들였던 고우영 화백의 일지매는 또 얼마나 나를 매료 시켰던가. 그 덕에 결국 끝끝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SBS 일지매보다 MBC 돌아온 일지매에 나는 더 빠지고 말았었다.

매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배회하다 순매원에서 제공하는 국수 한 그릇을 받아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작년에까지는 무료였던 식사였지만 올해는 1,000원을 받는데 그래도 그 맛은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호로록호로록 국수를 비워내고 버스 시간에 맞춰 다시 원동역으로 향한다.

다시 역무원께 버스 타는 곳을 여쭤 원동초등학교 앞으로 버스정류장에 앉으니 그 뒤편 슈퍼 그늘에서 쉬고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손짓을 하며 부르시기에 시간도 남는 겸 쪼르르 달려가니 사진 찍는 학생이냐며 묻기에 비슷하다고만 대답했다. 그 말에 무덤덤히 더 좋은 매화 밭이 있다고 운을 떼시며,

“그럼 지금 오는 버스 타고 범서 지나서 서룡리라는 마을에서 내려서 길 건너 바위가 있는 동네 쪽으로 주욱 올라가면 지금 본 것보다 더 잘 핀 매화 볼 수 있어요. 거길 가 봐요. 여긴 아직 해가 덜 들어서 거기만 못 해.”

하시는 말씀에 솔깃하여 일단 감사 인사를 드리고 버스정류장에 서 버스시간표를 확인하니 안타깝게도 12시 30분 버스 다음에는 15시 버스나 타야 양산시내로 갈 수 있어 살포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귀한 정보 들어놓고 활용도 못하니 참으로 어설픈 여행자가 아닐 수 없으나 통도사에 대한 욕심과 잡아놓은 선약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도 더없이 컸다. 버스는 어김없이 제 시간에 정류장에 도착했고, 차비를 내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는 풍경은 아직은 봄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갈색의 풍경이었으나 그 가운데 근근이 피어 있는 봄의 첫 손님 매화를 보고 있자니 그래도 찬 바람 사이 스며드는 봄기운에 부쩍 기분이 좋아진다.

바야흐로 3월도 또 반도 지난 시기에 그래도 아직은 덜 피었다는 봄꽃들이지만, 섬진강 줄기와 기찻길 옆 사이에 핀 순결하고 고결한 매화꽃을 볼 수 있다면 까짓 꽃샘추위야 옷 저밀만큼 매서우랴. 봄, 진정 따듯한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