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물 마을을 지나 바다 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바다를 바라보기에 최적의 장소를 만나게 된다. 용담-이호 해안도로에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공간이다.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이라 북쪽 동쪽 서쪽 어느 쪽을 바라봐도 파란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다. 겨울을 지내고 있는 잔디가 많이 죽어 있어 군데군데 보호덮개를 씌워놓았다. 문주란도 힘없이 푹 늘어져 있고.... 봄이 되면 다시 제 푸른 빛깔을 되찾겠지!
벤치에 앉으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쉬리'에 나왔던 중문에 있는 호텔신라의 일명 '쉬리의 언덕보다' 내겐 여기가 더 좋아보인다.
공원 끝부분 울타리에는 싯구들을 적어 놓아 눈길을 끈다.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있게 시를 읊어볼 수 있는 곳이다.
바다와 시는 훌륭한 조화이다.
이 곳 일대는 내 초등학교 시절 '어영'이란 불리던 곳이다. 어영이란 이름은 '어염'이 변형되어 생긴 말이라고 하는데 이 일대 바위 위에서 주민들이 소금을 만들었던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영마을은 1980년대에 들어와 제주공항 확장으로, 그리고 이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원주민들은 거의 떠나야 했고 지금은 횟집과 펜션들, 그리고 카페촌이 형성되었다.
어영마을의 바닷가에도 역시 어김없이 용천수가 솟아나온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수!
'섯물'이란 안내판이 붙어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한 용천수이다. 여자들이 이용했던 물이라 '여탕'이라고 새겨놓았다. 상수도가 없던 시절, 이 물은 마실 물이었고 야채를 씻어내는 물이었고 또 목욕물이었고 빨래물이었다.
바다쪽 가까이 전망대로 걸아가본다.
거무튀튀한 바위들, 이 곳은 낚시꾼들의 무대이다.
마을 동쪽에도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곳에 '연대'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 연기를 피워 급한 소식을 전했던 중요한 통신수단이다. 기록에 의하면 장수 6명과 봉수군 12명이 배치되어 24시간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언제부턴지 해안도로의 보도블럭 바닥엔 군데군데 제주도 사투리를 적어놓은 옛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제주바다에 가면 화가 난 것도 풀어지고 눈물 찔끔 흘린 것도 마르고.' '등 아프게 타지마라, 그럼 어떻게 탈까? 살짝 올라타라.'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릴 적 친구들과 말타기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이 해안도로는 관광도로이기도 하지만 제주시 사람들에겐 추억을 곱씹는 거리이기도 하다.
어영 바로 동쪽은 작은 포구가 있는 다끄내마을이다. 용담포구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 이름은 다끄내 포구이다.
1985년 제주국제공항 확장으로 다끄내의 마을사람들 또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하지만 포구에는 고깃배들이 꽤 많이 보인다. 주변 횟집들에 자연산 생선을 공급하는 수단들이다.
이 다끄내 바닷가는 해안선이 단조로워 포구가 들어설 수 없는 지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이 돌을 쌓고 바위를 깍아내어 포구를 만들었기에 '닦은 갯가'라는 말에서 '다끄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포구엔 '해신당'도 자리하고 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다끄내의 좀녀(해녀)와 어부들의 안녕을 빌었던 민속신앙의 흔적이다.
작은 포구답게 해신당도 소박하다. 작은 제단 위에 '해신지위'라는 비석을 세워놓았다.
다끄내의 용천수는 '다끄내물', '여름철 얼음처럼 차가운 용천수'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먹는 물, 야채 씻는 물, 빨래와 목욕하는 물이 칸칸이 구분되어 있다.
다끄내 포구를 나와 용두암 근처까지 걸어와 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초등학교 때는 용두암 부근에서 놀던 시절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다끄내는 몰라도 어영까지는 갈 생각을 못했었다. 워낙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른이 되었기에 가까워진 길일까. 사실 도두봉에서부터는 6km가 넘는 꽤 먼 길이다. 하지만 다리가 아프지는 않다. 아름다운 바다와 어릴적 추억이 또한 함께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도블럭에 붙여진 사진들이 다시 눈길을 끈다.
'새색시 구할 때 마음을 봐야지, 얼굴 고운 건 한 달이여.' '절약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일생을 편안하게 산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씀들이다.......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고향, 언제 와도 좋은 고향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