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과 인연.

그리고 저마다의 사연.

더불어, 즐겁고 반가와서

같이 손을 맞잡고 손뼉을 치며 웃음을 같이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북받치는 설움으로 부등켜안고 같이 울어줘야하는

그런 아픈 인연과 사연도 있다.

숱하게 만나는 다양한 인연과 사연들,

그 중에서 살아서 나누는, 이른바 산자들의 인연과 사연은

어떤 아픔과 오해가 있더라도 만나서 풀 수가 있다.

체온을 나눌 수있는 시공이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의 인연과 사연은?

그들이 간직한 오해와 아픔은?

과연 어떻게 풀고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1599번지...

제주도의 동단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고 누운 마을, 그곳에...

너븐숭이 4.3 기념관.

아직도 아는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은 제주의 아픔,

아직도 마르지 않은 제주의 눈물이고 통곡의 공간이다.

"너븐숭이"는,

마을 주민들이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쉬어가는 그들의 많지 않은 휴식을 위한  그저 "평화로운" 공간이다.

적어도 1949년의 만행이 있기 전까지는...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은 채 싸늘히 식어갔고,

배고파 울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고 있었다.>

-- 강 요배 作<젖먹이> --

한 때, 이 마을은 무남촌(無男村)이었다.

남자 대부분이 학살 당한 탓에,

남자가 없는 마을...

아직도 섣달 열 여드렛 날(음력 12월 18/19일)이면

마을 전체가 제삿집이 된다.

<순이 삼촌>은,

삼촌의 얘기가 아니다.

이 곳 북촌리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혈육을 잃고

당시의 충격으로 수십년간 내상(內傷)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결국은 아이들 곁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거두고만

제주 여인의 피맺힌 얘기다.

제주에서 "삼촌"은,

뭍에서 처럼 아버지 형제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촌수에 관계없이 먼 친척도 좋고, 마을 어른이라도 관계없는,

심지어 남녀의 구분도 없이,

친근한 어른들을 아우르는

"어르신"에 해당하는 보통명사이다.

작가 현 기영(1941~ )님의 실화성 소설 "순이 삼촌"은 금단의 역사를 들춰낸 한의 고발이다.

작가는 이 책으로 인해 끊임없는 구금과 박해를 받았다.

그로 인해 한 때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결국은 누군가가 풀어야 할 머지않은 과거의 만행,

반세기가 다 되도록 실상은 은폐되고

잔해는 엄폐되어 선진 조국의 아픈 그림자가 되어 갈 무렵,

이른바 민주화의 바람곁에서 세간에 드러난 그들의 눈물.

어처구니 없게도 가해자는 없고,

저 검은 땅에 피해자만 남아서 땅을 치다가,

노 무현 정부 들어서 비로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로

반 백년 만의 가해자도 나타나고,

급기야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의 파편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

3세, 4세,  6세, 8세, 9세, 11세, 12세...

무엇을 알까, 저 나이에.

저들이 철들기도 전에 사랑하는 조국, 국가로부터 받은 것은

국가의 철<銃>든 사람으로부터 받은 단 하나,

총알세례였다.

69세, 75세, 76세,79세...

이데올로기를 알까, 저 연세에. 더구나 왕조시대에 태어나신 저 분들이.(당시는 1949년)

다섯 시간 동안 그저 이유 없이 총탄을 맞아야 했던,

심지어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들의 사격 표적으로 서야 했던,

한 마을 주민, 700여명 중에서 470여 명이

그렇게 제주 하늘의 영원한 먹구름이 되었다.

제주에서는 아이들의 무덤을 별도로 만들지 않는다.

아이의 영혼은 직접 저승에 들지 못하고

까마귀가 하늘로 영혼을 인도해야 비로소 저승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 너븐숭이에는 아기 무덤 17기가

60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철부지 나이 그대로, 검은 땅속에 누워 있다.

얼마나 아프고 시릴까.

누군가는 하루빨리 그들의 이름을 불러 줘야한다.

그게 살아있는 우리들의 의무다.
 

아직도 저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한(恨)의 영령들이 많다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그들의 유해 발굴 예산이 삭감되었다면

그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다.

그 분들의 마지막 피눈물까지 마저 흙으로 돌아가기 이전에

하루빨리 되돌려야 한다.

그게 도리다.

그 불쌍한 분들에게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벌 받는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무리 늦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수십 성상을 지나면서 이미 눈물마저 화석이 되었을 그들에게,

대리석 원혼 위령비 하나로 그 기막힌 비극의 실타래를

어찌 다 풀 수가 있을까.

가슴이 아프다.

아픔은 통증이다.

옛날에 통증은,육체에서 비롯된 감각이 아니라

귀신이나 신의 오묘한 장난쯤으로 해석했다.

과학적으로 규명을 해야하는 오늘날의 통증은,

"실제적 또는 잠재적 조직 손상에서 연상되거나 이러한 손상으로

묘사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이라고 정의 한다.

통증은 어떤 식으로든 치료를 해야만 한다.

심히 괴롭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들이 고인들을 물리적으로 치료 할 수는 없다.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의 적절한 조화가 우선이다.

고통은 당사자가 가장 절실하다

어차피 당사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땅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이 가해자다.

그리고 또한 피해자다.

같이 울고 같이 풀어야 한다.

어느정도 짐작은 한다.

아직도 당시의 직계 가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 사회의 화려한 조직원이 되어 살고 있슴을.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가 아직도 많이 불편하다는 것도.

그리고 이미 공소시효가 까마득히 지나서 그들의 법적 책임이 소멸되었다는 것도.

그래도 밝힐 것은 밝혀야한다.

불편한 진실도 엄연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진실"이라는 것은 그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끗이 열어야 한다.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와 그들의 검게 탄 가슴속 진실을.

결국은 그들 곁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용기있는 위정자가 필요하다.

일 년에 한 번, 흰색 국화꽃 한송이로 생색을 낼 일이 아니다. 

서럽게 숨죽여 살아오신 남은 이들의 통곡도 들어보고,

제주섬 구석구석에 아직도 선혈낭자하게 묻혀있는

그들의 찢어진 영령들을 하루빨리 양지바른 곳으로 모셔내어서

그들의 이름들을

가식없는 진실의 목소리로 불러 드려야한다.

서둘러야 한다.

그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그들의 체온을 그날처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아직 산 자의 이름으로 숨쉬고 있을 때...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영혼이 부끄러움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인디언 기도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