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산타 크루즈 트랙킹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들은 후, 안그래도 내키지 않았던 나는 과감히 포기하고 와라스의 명물 69호수를 보고 바로 저녁에 리마행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미리 와라스 시내에 있는 CIAL 버스회사를 찾아가 바로 리마로 가는 세미 까마 버스 티켓을 구입했다.

호스텔에서 만났던 한국분의 말에 의하면, 새벽같이 일찍 나가야 69호수를 보고 내려와 돌아오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해서 6시에 숙소에서 빠져나와 전날 미리 확인해둔, 융가이 행 버스가 출발하는 터미널로 향했다. 와라스에서 69호수를 가기 위해선, 융가이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융가이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 타고 69호수까지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서둘러야 했다. 게다가 오전에 날씨가 좋고 오후가 되면서 흐려지기 때문에 좋은 날씨를 보기 위해선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미리 확인했고 큰 대로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터미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버스에 타기 전 멀리서 보이는 만년설이 쌓여있는 산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작은 봉고차에 사람을 가득 태워 버스는 출발했다. 중간중간에도 길에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면 자리가 없어도 태우며 융가이로 향했다. 버스 기사는 융가이(Yungay)에 나를 내려주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다시 69호수(라구나 씨에스 누에베)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라 그런지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득 채우고 난 뒤에 출발해서 마음은 조급한데, 버스 터미널에서 잠시 기다려야 했다.

역시나 사람을 가득채우고 나서야 출발한 봉고차는 산길을 따라 계속 달렸다. 아직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버스를 세우더니 손님들이 우르르 내려 길가 옆에 쌩뚱맞게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나는 전날 미리 준비해둔 간식거리들로 배를 채워 언제가나 멍하니 기다릴 뿐이었다. 하긴 이사람들이야 나처럼 아침 일찍 가서 트랙킹을 하는 것도 아니니 조급할 일이 없긴 하겠다. 게다가 이들은 느긋한 남미사람들 아닌가...

결국 마음을 비우고 – 남미를 여행하며 도 많이 닦는것 같다. – 기다린 끝에 봉고차는 다시 출발했고 산길 옆으로 아름다운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 옆에 타고 있던 아저씨가 나를 툭툭치며 밖을 가리켰다. 옥빛의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버스를 잠깐 세우고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고...나의 속도 몰라주는 운전기사는 그저 쌩하고 호수를 지나쳐 갈 뿐이었다.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던 곳>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있을 줄 미리 상상을 못해서 바로 떠나는 버스티켓을 구입했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좀더 머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진작에 이런 것들을 알아보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얼마 안가 다시 봉고차는 산길 모퉁이에 날 내려주고 다시 쌩~하고 가버렸다.

정말 황당하게 길 모퉁이에 내려주고 어디가 입구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가버려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길 옆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제대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자주 다니며 생긴 길인 것 같았다. 밑으로 내려오니 눈 앞으로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비밀의 텔레포트를 타고 미지의 파라다이스로 이동해 온 기분이랄까.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근처 나무 다리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불현듯 이곳이 맞나?하는 의심이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떠오른 의문...다시 길을 돌아 처음 출발지로 가니 69호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역시 여자의 예감이란...^^

길은 오르막이 없고 평평한 길이 대부분이었지만 해발고도가 벌써 4,600m정도 된 곳이다보니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빠오는 탓에 그리 빨리 걷지도 못하고 천천히 가다 쉬다를 반복해서 가야했다. 이것은 체력의 한계가 아니라 고산이기에 어쩔 수 없는 증세였다. – 고산증세는 사람마다 매우 다른데, 나같은 경우 이미 고산지대를 따라 계속 내려왔기 때문에 심각한 고산증세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 몸 자체가 고산에 좀 취약한 것 같았다.

예전 유럽 배낭여행 시절에 스위스 리기산에 등산열차를 타고 올라갔다가 고산증세로 거의 기절하다시피 해서 내려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그것이 고산증세인줄도 모르고 그냥 내 몸이 피곤한 줄 알았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확실한 고산 증세였던 것이다.

고산증세가 나타남에 따라 가지고 온 귤을 까 먹기 시작했다. 수분이 많은 과일은 고산 증세를 완화시켜주기도 하고 귤에 포함되어 있는 비타민도 도움을 준다고 들어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초코바와 귤, 과일, 빵을 미리 준비했는데 정말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최대한 복식호흡으로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를 반복하며 움직였다. 뭐니뭐니해도 중요한 것은 내 몸이기에 최대한 무리하지 않는 상황에서 천천히 가기로 결정했다.

비수기인 탓에 그 넓은 평원에는 소 몇마리와 나 뿐이었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이 길이 맞는걸까 하는 의문도 가지며 일단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큰 오르막이 없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멀리 보이는 폭포의 멋진 위용...

폭포를 바라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오르막 길이 나온다. 이제 행복 끝에 난(難)이 온다는 건가…ㅠㅠ꼬불꼬불한 이길을 조금만 오르면 되겠지...하며 오르고 또 오르고. 숨은 평지를 걸을 때보다도 더 가빠지고 가다 쉬다를 반복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그 간격이 짧아질 무렵 예상했던 끝은 보이지 않고 언덕 너머 또 다른 언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주변으로 보이는 풍광은 어찌나 아름다운지...게다가 혼자서 숨이 차서 헉헉 거리는 와중에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소들...

그많은 소는 누가키우나 했는데, 이곳 소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풀 뜯어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넓고 넓은 평야에서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살아가는 소의 저 삶이 빡빡한 도시속에서 숨죽이고 빠듯하게 살아가는 도시속 인간들보다 더 나아보였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오르막을 그렇게 세번인가를 넘었을까...

게다가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저 멀리서 흰 수증기같은 구름들이 몰려오더니 조금의 힘도 쓰지 못하고 흰 구름들에 가려져버렸다. 이래서 다들 오전에 일찍 가라고 하는 것인가 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숨이 가쁠 뿐이었던 증세가 두통이 조금씩 밀려왔고 조금은 어지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숨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그 순간을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내 몸 속 심장에서는 그 부족한 산소를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이제 끝이구나 싶은 평지가 나타나고 작은 호수가 보였다. 혹시 이곳??

근데 얘기 들은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호수였다. 뭔가...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이제 언제쯤 더 가면 될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 반대편에서 남자 셋이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반가운 마음과 한결 안심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얼마정도 남았냐고 물어보니 40분정도 더 걸어가면 된다고 한다. 오망기갓!!!!!!OMG!!!天哪!! 안돼~!!!!

나에게 안됐다는 표정으로 씽긋 웃어보이고는 그들은 가벼운 발걸음을 하고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무려 엄청 빠른 발걸음으로...하긴 내 다리의 두배는 될 것 같은 길이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빠를 수밖에... 남자 걷는 속도로 40분이라면, 내가 그곳까지 걸어간다는 것은 오늘내로 하산하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이대로 40분 혹은 그 이상 걸리는 69호수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내려가야 할 것인가. 객관적인 상황판단이 절실했다.

일단, 내 고산증세는 갈 수록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이미 오후 1시를 넘긴 시간. 출발한지 벌써 4시간을 지난 시간이었다. 이제 길을 돌려 서둘러 돌아가면 지나가는 버스를 붙잡을 수도 있을법한 시간이었지만 만약 여기서 더 지체하고 69호수를 보게 된다면 69호수를 보았다는 즐거움은 크겠지만 자칫하면 버스를 놓치고 리마로 가는 버스도 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결론은 지어졌다. 아쉬운 마음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쉬웠지만 객관적인 상황 판단 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라구나 69야...나중에 언젠가 꼭 체력을 더 기르고 여유있는 상태에서 다시 오도록 해볼께”

다시 걸음을 돌려 그동안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확실히 내리막이라 오르막보다는 숨이 덜 찼지만 역시나 고산인 탓에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올라왔을 때보다는 훨씬 빠르게 내려올 수 있었다. 올라갈때보다 훨씬 적은 시간에 내려오게 되어 아까 버스를 내렸던 곳에서 혹시나 내려올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택시 한대. 그 안에는 내려가는 길에 나를 추월해 내려가던 외국인 남자가 타고 있었고 나에게 같이 내려가지 않겠냐는 희망의 소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버스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침 걱정하고 있던 찰라에 이런 희망의 빛줄기가...

택시 기사 아저씨는 우리를 태우고 내려가던 중, 치난꼬챠 호수에 내려주었다. 잠시 둘러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감사할수가... 비록 날씨가 흐려져서 하늘이 반사된 물빛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까 올라오며 놓쳤던 호수 중 하나를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서 기뻤다. 호수 옆에 씌어진 정보를 보니 이곳 고도가 3,850m. 역시...고산이다. 하지만 위에서 느꼈던 고산 증세가 거의 가라앉아 이제는 많이 편안해진 상태.

다시 택시를 타고 융가이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비록, 69호수의 아름다움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에 본 풍경 또한 아름다웠기 때문에 억울하지 않았다. 69호수가 아름답다는 건, 물론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곳까지 가는 그 힘든 여정에도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와라스 숙소로 가 버스 시간까지 의자에 앉아 쉬었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며, 짐을 뺐기 때문에 침대에 누울 수는 없었지만 소파에서 편하게 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버스 시간이 되어 짐을 빼려는데, 안그래도 어제 얘기했던 부엌 사용료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었다. 최대한 얘기를 해서 15솔로 깎았지만 그 돈을 주고 나오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수 많은 여행중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숙소비가 20솔이었는데, 주방하나 이용했다고 15솔이라니...

이제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간다.

===============================================================================================

2010.11.22

Huaraz - 융가이*2 : 5*2
융가이 - 69호수*2 : 10*2

국립공원입장료 : 5.00 
지난밤 주방사용 : 15.00

Total : 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