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바 강변에서 -


기차는 새벽 5시라는 꽤나 이른 시각에 상트 페테르 부르그에 도착했다.
기차 내에서 강한 에어컨 바람에 목도 상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까닭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아침 10시 정도에 일어나서는 시를
관통하는 네바 강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간다고 간 것이 길을 잘 몰라 반대
방향으로 걸었기에 반대편 끝인 네브스키 성당까지 가서야 내가 잘못 왔음을
알았다. 애시당초 그곳은 갈 계획이 아니었고 걸어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다 싶어 근처에서 지하철을 타고 며칠 뒤 가게 될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 행
버스표를 알아 보러 갔다. 중국에서 몇 번 표를 구하는데 애를 먹어본 기억 탓에
어떤 도시에 도착하면 일단 다음 갈 도시에 대한 교통편을
사 두고 난 뒤에야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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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표 사무실 바로 앞까지 갔을 때였다. 한 러시아 여성이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
조금 듣다 말고 내가 러시아말을 못하니 영어로 말해주겠냐고 묻자 그녀는 그제서야
영어로 말을 했다. 내용인즉슨, 자기가 돈이 떨어져서 집에 갈 수가 없으니 돈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차림새는 멀쩡하여 거지는 아닌 것 같았는데 눈이 풀리고 입가에
끈적한 침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아까 전 길을 반대 방향으로
들었을 때에는 한 러시아 중년 남성이 말을 걸며 택시비를 달라고 했는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아까처럼 나는 돈이 여유치
않다고 말한 후 내 갈길을 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한 눈에 보아도 외국사람인
내게 다짜고짜 영어도 아닌 러시아어로 돈을 구걸한 그들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외국인 여행자라면 부유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서 그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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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표 사무실에서 가격과 시간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엔 다시 기차표 매표소로 향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같은 구간이면 버스가 기차보다 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교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간 기차표 매표소. 바로 매표 창구로 가지 않고 정보 안내소에
들렀는데 두 곳의 안내소 직원은 모두 영어를 하지 못했다. 첫 번째 직원이
영어를 못한다고 했을 때는 바로 돌아섰으나 두 번째엔 그냥 물러설 수가 없어 -탈린-
이라는 단어를 외쳤는데 그랬더니 알아듣고는 -노 트레인, 온리 버스- 라고 직원이 답했다.
이토록 철도가 발달되어 있고 지리적으로 서로간에 가까운 나라인데 왜 노선이 없는지
무척 의아해하며 돌아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도 군사적인 경계 때문인듯 하다.

- 피의 사원 -

- 모스크바와 상트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의 결혼식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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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버스를 타게 된 건데 다시 곧장 버스표 사무실로 가기는
비효율적인 것 같아 오후동안 시내 구경을 하고 저녁에 표를 사기로 하였다.
기차표 매표소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던 관광지는 피의 사원이었다. 내가 그 건물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스크바의 바실 성당과 매우 흡사한 멋진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일단 넓직한 붉은 광장의 끝에
자리한 모스크바의 바실 성당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좁은 길목에 위치해 있었고 무엇보다도
부분적으로 공사중이었기에 놓여져 있었던 건축 자재들은 건물의 미관을 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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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미따쥬 박물관의 정면 모습 -

이후엔 근처에 있던 네바 강변을 거닐었다. 상트 페테르 부그르 시내를 굽이 굽이 감아 돌며
흐르는 네바 강의 폭幅은 유럽의 여느 도시에 흐르는 강들보다도 넓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강변의 풍경처럼 그곳도 선상船上의 레스토랑, 유람선, 수많은 가판대들이 보였고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산책나온 사람을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강변의 모습을 감상하며 한 시간 정도를
걸은 다음 바로 옆의 에르미따쥬 박물관으로 갔다. 시간이 늦어 입구가 닫혀 있었지만 매표소와
주변 건물 위치를 확인해 두어 당일날 그곳에 가서 입구를 찾아 헤매이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이 습관 역시 여행 도중 생긴 것이었다. 박물관의 구조와 위치를 파악하고서는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우리나라 여름철의 7시 정도 밝기였는데 시간은 충분히 늦은 11시였다.
이는 모스크바 보다도 더 높은 위도상에 있어 더욱 해가 늦게 지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특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