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톤에 달한다는 차르 캐논 -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크렘린 궁으로 향했다. 모스크바 뿐만이
아니라 전 러시아의 상징이기도 한 크렘린을 마지막 날 보게 된 것은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겠다는 심정이 아니라 이래저래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와서인지 매표소도 한산했고 크렘린 궁의 내부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나는 궁 내부를
한가롭게 거닐어 볼 수 있었다. 궁의 내부에서는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관람객이
그 곳을 넘어가지 못하게 통제했기에 갈 수 있는 곳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그래서 궁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붉은 성벽은 오히려 외부에서 더 가깝고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 200톤짜리 초대형 종 -

내부에는 여러 채의 러시아 정교회당, 성당 건물과 초대형 대포, 종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무교인인 나로서는 역시 종교적 건축물 보다는 나머지 것들이 더 흥미로웠다. 각각 40톤과
200톤에 달하는 대포와 종은 저걸 실제로 사용할 수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했다. 이 대단한 규모에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러시아도 중국 만큼은 아니지만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에 어느 정도는 집착을 보이는 것 같다. 성벽 우측의 공원까지
둘러보고 나서 밖으로 나오는 길에 중국, 한국, 프랑스 각지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발품을 팔았던 덕에 끝없이 밀려 들어오는 그들에게
이리저리 치이지 않고 여유롭게 관람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론 -짜리치노-로
향했다. 학창 시절 세계사 책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캐서린 대제- 라는 단어와
연관이 있는 곳이엇다. 나는 숙소의 직원이 추천해주었기에 그곳으로 갔을 뿐
그곳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고 그 위치도 시내에서 동떨어진 조금은 생뚱맞은
위치였기에 혹시 그가 잘못 알려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하철
출구로 나와 공원에 들어서서 본 첫 모습은 이제까지의 우려와 걱정을 불식시켜 주었다.

- 짜리치노의 숲길 -

큰 호수를 끼고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고 공원의 정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공원의 중심부에서 나지막하게 고전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날씨는 적당히 구름이 끼어 덥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그 공원에서 느꼈던
한적함이었다. 나는 공원의 중심부에서 비교적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쉬었는데 조깅을
하는 사람이 가끔씩 지나갔고 물가엔 오리떼와 한가로워 보이는 낚시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간 밀린 기록과 가계부도 정리하고 한참을 쉬다가 공원의 반대편을
둘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있던 곳의 반대편으로 건너갔는데 그제서야
내가 본 것은 그 공원의 일부였고 그곳이 무척 넓은 곳이란 사실을 알았다.
공원 내의 안내도를 보고 안 사실인데 처음 내가 본 곳은 전체의 1/3도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갈래 갈래 수없이 많은 길이 나 있었는데 그것을 모두 다 가볼 수는 없었기에 3번에 걸쳐
다른 길로 공원을 돌아보고 난 후 공원 밖으로 나왔다.

- 레닌그라드스키 보끄잘(역) -

숙소에서 짐을 챙긴 후 상트 페테르 부르그로 가기 위해 모스크바 역으로 갔다.
모스크바 역에는 모두 9개의 기차역이 있는데 그 중에서 모스크바와 상트 사이를
오가는 기차는 거의 대부분이 -레닌그라드스키 보끄잘(역)-을 이용한다.
배가 고팠던 나는 기차를 타기 전 전기구이 통닭을 시켜 먹었다. 먹다가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했기에 남은 음식을 싸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싸달라고
음식점의 주인에게 요청을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조금은 귀찮은 마음에 옆에서
같이 식사를 하던 한 아저씨에게 음식을 싸가고 싶은데 어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동작을 취했는데 이해를 하지 못하던 그는 내가 세 번째 반복을 할 때에 이해했다며
자신이 갖고 있던 빵 봉지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빼서 내게 주고 자신의 빵은
그냥 식탁에 올려두고 먹었다. 나는 음식점 주인에게 대신 설명을 해달라는 의도였는데
직접 문제를 해결해주니 고마웠고 조금은 그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갔는데 무척 당황스럽고 조바심이 났던 이르쿠츠크에서와는
달리 이번엔 여유있게 전광판을 보고 내가 탈 기차의 위치와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전광판의 용어를 어느 정도 파악하기도 했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주요 용어는
대강 익혔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하루 이틀만 머무는 도시가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는 4~5일 정도를 머물게 되는데 이런 경우엔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대강의 도시 윤곽이 파악되고 어지간한 표지판이나 간판은 눈에 익게 된다.
나는 이런 것들이 익숙해졌다는 말은 곧 떠날 때가 다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전광판과 키릴 문자가 익숙해진 지금, 나는 모스크바를 떠나야 했다.

혹자는 4~5일만에 한 도시를 다 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 아니냐, 혹은 며칠씩 머무는 것은
수박 겉 핥기식의 여행이 아니냐고 비난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4~5일 만에 도시를
다 알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그 도시에 생활함에 있어 불편함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고 말할 뿐이며 나 자신의 기준에 대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쉬고 싶을 때 쉬었으므로
수박의 겉만 핥은 것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은 알맹이는 다 건져 먹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연구가나 직업적으로 도시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여행자였기에
그 도시를 손바닥 보듯이 줄줄 꿰고 있을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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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익숙해진 키릴 문자와 러시아 역의 전광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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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탑승해 내 자리를 보니 젊은 러시아 여성이 앉아 있었다.
나는 표를 보여주며 내 자리라고 말을 했는데 그녀는 발끈하며 무슨 소리냐고 반문을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7월이 아니고 8월인데 너는 7월 표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표와 대조까지 해가며 설명을 했다. 그녀의 표를 보니 출발과 종착지, 시간, 좌석까지
모두 내 것과 동일했는데 그녀의 말처럼 월月이 달랐다. 하지만 그 때는 7월이었고 제대로
표를 산 것은 나였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변의 다른 러시아 인들이 지금은 7월이니
너가 틀렸다고 하자 당황한 그녀는 황급히 짐을 챙겨 기차 밖으로 나갔다. 이 촌극을 끝으로
특히나 육체적으로 탈이 많았던 나의 모스크바 여정은 끝이 났다.

- 상트 페테르 부르그행 열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