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렘린의 외벽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꽃과 경비병들 -



어젯밤 묵었던 숙소는 모스크바의 친절한 대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최초의
숙소보다는 저렴했지만 그보다도 더 저렴한 곳을 알아냈기에 아침이 되자 마자
숙소를 옮겼다. 옮겨간 곳은 가격은 저렴했으되 시설은 더 넓고 깨끗하고 쾌적했다.

워낙에 일찍 숙소로 왔던 지라 투숙 시간까지는 몇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기에
짐을 창고에 넣어둔 후 크렘린 궁으로 향했다. 어차피 짐을 정리하기 위해 조금 후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궁의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외벽을 따라
궁의 주위를 천천히 둘러 보았다. 붉은 벽으로 둘러 쌓인 크렘린의 서쪽엔 분수대와
공원이 있었고 동쪽엔 붉은 광장과 바실 성당,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굼 백화점이
있었다. 그 중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은 붉은 광장이었는데 국제적인 도시, 국제적인
관광지답게 중국, 한국, 일본, 그리스, 프랑스 등 각지에서 온 단체 여행객들이 국기를
앞세우고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나는 인파가
넘쳐나는 붉은 광장보다는 그나마 사람이 적었던 바실 성당 부근이 좋았다. 전형적인
슬라브 양식의 양파 모양 돔과 갖가지 기하학적 모양을 갖추고 있는 건물 지붕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는데 예상보다는 큰 감흥을 받지 않았다.

- 바실 성당 -

굼 백화점까지 둘러 보고는 다시 숙소로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동안 계속적으로 변한 시차에 적응도 안 되었고
갈수록 길어지는 낮 시간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그런듯 싶었다.
그러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몸 상태에 영향을 받았는지 기분까지 좋질 않았다.
갑자기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았고 내가 왜 매일같이 돈을 써가며 먹을 것도 마음껏 못 먹고
이젠 봐도 별 감흥이 없는 것들을 보기 위해 몸을 굴려야 하나 싶기도 했다.
때마침 3인 1실이었던 다인실엔 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더욱더 생각에 잠겨
침잠하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청명한 모스크바의 하늘을 바라 보고 있노라니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떤 것도 보러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갑자기 감정이 이렇게 급격히 변한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을 나와서 일정 시점이 되었을 때 이런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던데
나도 그런 것인가 싶기도 했고 단순히 체력의 소진으로 인한 무기력증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여를 누워 있다가 계소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다가는 몸과 마음이
한없이 처질 것 같아 다시 마음을 다 잡기로 하고 숙소 직원에게 가서 주변의 가볼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추천해준 곳 중에서 가장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를
가보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1.2Km에 걸쳐 조성된 예술 거리인데 차량 통행을 막아 보행자
전용 거리로 만들었고 행위예술, 음악, 미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 전신 탈을 쓰고 있던 러시아인 -

거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온 몸을 이용해 훌라후프를 돌리던 한 여자였는데
그녀는 최대 5개까지 동시에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리의 양 옆으로는 관광 명소답게
맥주집과 기념품점이 즐비했다. 이상하게도 바닥까지 떨어졌던 나의 기분은 아르바트
거리의 초입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점점 더 호전되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노란 전신 탈 인형을 쓴 사람이 내게 포옹을 해 왔고 거기에 응했더니 그가 조금의 러시아
억양은 있지만 분명한 한국말로 -한국 사람입니까, 반갑습니다-라고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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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자 나를 가장 즐겁게 해 준 것은 거리의 한 화가였다. 사실 거리 초입에 정밀 묘사를
하는 화가를 보고서 -다른 화가가 없으면 돌아가서 저 사람에게 부탁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본 사람은 일부의 특징을
고의적으로 부각시켜 우스꽝스런 모습을 그리는 캐리커쳐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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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캐리커쳐 화가 -

그는 이제까지 걸어오면서 본 여느 거리의 예술인보다도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었고
장당 5분이 채 안되어 완성되는 그의 익살스런 그림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나도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앉아잇는 사람과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앞의 두 사람에 대한 그림을 보다가 세 번째로는 내가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동양인 한 명이
와서 앉으니 화가도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구경꾼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화가가 펜을 놀리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소와 실소를
번갈아가며 머금었고 그 모습을 보니 그림을 아직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곧 그림이 완성되었는데 내 얼굴을 가장 잘 아는 내가 보아도 그 짧은 순간에
특징을 참 잘 포착한 것 같았다. 나는 다른 고객들이 으레 그러하였듯이 화가의 바구니에
100R 을 넣었다. 100R 이라는 얼마 안 하는 돈으로 즐거운 기분과 물론 나를 하나 더
소유하게 된 셈이다. 그렇게 나는 한 시간 반 여를 아르바트 거리를 거닐었고 거리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좋아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르바트 가街,
세계의 많은 대도시들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예술가의 거리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곳을,
특히나 그때의 그 화가를, 자칫 여행에 대한 회의에 빠질 수 있었던
나를 구해준 고마운 곳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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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꼭 닮은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