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자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으되 같은 칸 안에 타고 있던 아르메니아 인이 말을
걸어왔다. 내 자리는 화장실 바로 옆 칸이었기에 거의 모든 사람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나를 보았을 터였고 그 중에서 내게 말을 걸었던 그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를
조금은 흥미롭게 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내게 몇 번 말을 붙여보더니 자신의 자리로
나를 초대했다. 그는 러시아어와 아르메니아어,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잣과 해바라기 씨를 즐겨 먹는 러시아 인들처럼 그들도 그것을 식탁에 올려두고 먹고 있었다.

보통 외국인을 만나면 그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말함으로써 -내가 너희 나라에 이 정도
알고 있을 만큼 관심이 있다- 라는 신호를 보내며 대화를 수월하게 트곤 했었는데 내가 아르메니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전무했다. 그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 코카서스 지방에 위치한 나라이며
인접국인 아제르바이잔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정도였는데 이것이 그 나라의
특징, 특산물에 대한 것이 아닌 부정적인 이야기라서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실제로 아제르바이잔과의 종교 갈등이 심각하다고 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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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 때문에 러시아를 왕래하는데 자신이 일하는 곳은 자신처럼 외국인이 와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은 여러 국가의에서 온, 여러 명의 여자친구가 있다며 나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나중에 한국인 여자친구도 사귀고 싶다며 나에게 이름과 안부를 묻는
간단한 한국어 회화를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기꺼이 알려주었다. 어느 정도 그와
친해졌을 때 기차가 멈췄다. 열차가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멈추는 역이 수십개나 되지만 나는
이제껏 단 한번도 정차시에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괜히 정차 시간을 잘 모르고 내렸다가
열차가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고 혼자서 들락 거리기엔 부담이 되는 나의
짐짝 때문이기도 했다. 열차가 멈추자 같이 대화하던 아르메니아 인이 급히 내렸고 나도 이번엔
겁도 없이 그를 따라 내렸다. 나도 횡단 열차가 모스크바에 닿기 전에 -키오스크-라 불리는
소형 매점이나 가판대를 꼭 이용해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그와 함께였기에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승무원에게 정차 시간을 물어보고 나서 알려주었고 키오스크에서는 주문과 가격까지
러시아어로 듣고 내게 영어로 옮겨주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오후 6시가 조금 넘어서야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다. 처음 횡단 열차를
탈 때는 책도 읽고 몸도 휴식을 취하며 사색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첫 날과 둘째 날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항상 즐겁고 설렐 수는 없는 법,
몇 번의 해프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째 날부터는 따분하고 지루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경과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나는 기나긴 시간 동안을 횡단 열차와 함께하며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하게 되었다.

숙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보이는 건물을 한 바퀴 돌았는데 도통 들어가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기차역 바로 앞에 있던 지하철 역은 출구과 입구의 건물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는데 나는 출구의 건물 앞에서 뱅뱅 돌았던 것이었다.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에 웃으며 말을 걸어온 한 러시아 청년 덕에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나 역시 러시아어를 전혀 못했지만 손짓, 발짓으로 입구를
찾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익히 듣던 대로 모스크바의 지하ㅊㅕㄹ 역사내는 고풍스럽고 멋스러웠다. 비상시 방공호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사는 지상으로부터 꽤나 깊숙한
위치에 있다. 이 곳의 전철은 1~2분에 한 대 꼴로 다녔기 때문에 앞 차를 놓쳤다고 해도
별로 지장이 없어 보였다. 숙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렸고 어느 쪽 출구로 나가야
숙소에서 가까운지 몰랐던 상황에서 그것을 직접 알아볼까 하다가 물어보는 것이 빠르겠다
싶어 지나가던 러시아인에게 물어 보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원한다면 출구의 방향은 물론 약도에 나와 있는 숙소까지 같이 찾아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영어를 곧잘 하는 젊은이들이었는데 굳이 혼자 찾으려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같이 가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그래주면 고맙겠다고 대답했다.

- 길 안내를 해주었던 모스크바의 대학생과 -

나를 궁핍한 여행자로 보았는지 아니면 외국인 친구에 대한 순수한 호의였는지 모르겠지만
길을 앞장서 가던 그들은 가는 길에 빵까지 사서 먹으라며 주었다. 배고프던 차에 그것을
덥썩 받아 먹고 나니 이번엔 케밥을 사주려고 했는데 이 선을 넘어가면 심적으로 부담이
될만큼의 호의를 받는 것 같아 웃으며 사양했다. 일반적으로 게스트 하우스는 대로변이 아닌
건물 뒷편에 있는 것을잘 몰랐던 그들은 거의 근접한 위치까지 와서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 약도를 보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그쪽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며 내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어가며
그들이 주변의 다른 러시아 현지인에게 서너 번 더 길을 물어본 후에야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기념으로 사진을 같이 찍고는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그들을 보냈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숙소로 올라갔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했을 뿐더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구舊소련의 잔재인
-거주지 등록-을 강제로 시키려 들어 결과적으로는 그곳에 묵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던
다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비록 방금 전의 친구들이 찾아준 곳을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모스크바 대학생의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