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드카처럼 화끈했던 러시아 노신사들 -
어제 그분들이 건넨 술을 사양도 않고 모두 넙죽 넙죽 받아 마신 덕에 어제 밤에는
언제 잠드는지도 모르게 잠들었었고 아침 늦게야 일어나게 되었다. 그분들께는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혼자 다니는 장기여행자-라고 합리화시키며 혹시나
하는 사고에 대비해 여권과 지갑은 잠이 들더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채비를 하고 놀다가 잠이 들었고 다행히도 일어나 보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분들이 다들 모여 앉아 이미 또 술판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번 여행 중엔 항상 그래왔지만 여행중, 특히나 혼자서 다니는 경우에는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하자라는 생각을 가져 왔었다.
물론 그것에 너무 신경 쓰다 보면 현지인들과 친해지는 데에 자연스레 한계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점을 잘 다스리는 것인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고 나는 이제껏 조심하는 쪽에 치우쳐 왔었는데 국적을 불문하고 여행중인
나에게 진심으로 선행을 베풀어 주신 모든 이들이 그저 나의 그런 마음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갓 일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에게 그분들이 불쑥 내민 것은 한 잔의
맥주였다. 웃으며 사양을 하고 세수를 하러 갔는데 수도꼭지를 아무리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물 탱크에 물이 벌써 떨어졌나 싶었는데 러시아 열차 내의
수도는 수도 밑에 있는 버튼을 위로 올려 누르는 동안만 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 러시아 여행 정보에 대해 알아볼 때 알게 된 것인데 골프공이 배수구의
크기와 딱 맞기에 그것을 이용하라는 사람도 있었고 꾼 등으로 버튼을 묶어 고정시키고
쓰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두가지가 모두 없던 나는 그냥 컵에 물을 받아서 사용했다.
이렇게 쓰면 간단한 것을 뭘 다른 도구를 동원하나 싶었는데 나오면서 보니 물을 받아서
쓰지 말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사용하기 전에는 그저 식용으로 쓰지 말라는 뜻이겠거니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물을 절약하기 위해 받아 쓰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그것을
몰랐던 나는 이미 그렇게 사용해버린 후였다. 세수를 하고 나와 자리에 앉아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있으니 이번엔 그분들이 보드카를 권해 왔다. 애주愛酒 정신이 참 대단한
그들이다. 나는 아침도 먹었겠다 더 이상 마다할 이유도 없어 그때부터 어제처럼 주는 대로
그저 받아 마셨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놀다 보니 창 밖엔 황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노인 분들은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아니었던지 노보시비르스크 역에 기차가 서자
짐을 가지고 기차를 내리려 했다. 나는 그들이 떠나기 전 몇 마디 알고 있는 러시아 말
중에서 -잘 가- 에 해당하는 -다스비다니아-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그들은 외국인이
러시아말로 인사하는게 신기했던듯 다들 유쾌하게 웃으며 나의 악수를 받아 주었고
엄지 손가락을 세워 내게 보여주며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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