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묵었던 곳에서 신세를 오랫동안 지기 죄송해 일찍 나와서 기차역에 짐을 맡기고
기차 시간 전까지 시내를 둘러 보려 했는데 나를 재워주셨던 분은 괜찮으니 짐을 집에
두고 시내 구경을 하고 오라고 하셨다. 이르쿠츠크 시내를 걸으며 북적이는 재래 시장에
가서 딸기를 사 먹었고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기 빵과 크바스를 한 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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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꺼지지 않는 불꽃- 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을 둘러 보았고
마지막엔 언제 다시 볼지 기약을 할 수 없는 앙가라 강을 보며 강변에 앉아 넋놓고 쉬었다.
시간이 다 되어 배낭을 가지러 돌아가며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조그만 케익을 하나 샀다.
학생이 돈도 없는데 뭐하러 이런 것을 샀냐며 점심까지 먹고 가라고 나를 붙잡으셨는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집을 나서며 한국에 가서 꼭 연락 드리겠다고 인사를 했더니 그땐
한국식으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자며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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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으로 가는 길엔 소나기가 왔다. 순간이었지만 폭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빗줄기가 굵었다.
이르쿠츠크는 내게는 알혼 섬을 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격이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아쉬운
마음을 가진, 떠나는 자의 가슴과 눈 대신 한 줄기 비를 내려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트램에서 내려 기차역으로 뛰어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역사로 들어와보니
옷과 배낭이 전부 젖어 있었다. 대합실에서 전광판을 보며 기다리는데 러시아에서 처음 타보는
기차인지라 모든 것이 생소했다. 내가 탈 기차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갑자기 승강장으로
우루루 뛰어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과 덩달아 뛰어가면서 여러 사람을 붙잡고
-모스크바?-라며 물었으나 모두가 아니라고 했다. 분명히 그때 시각은 내가 탈 기차가
도착할 시각이었는데 사람들은 뛰어가고 모스크바 행은 아니라고들 하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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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차를 놓치면 시간적, 금전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 상황이었기에 다급한 마음에
허둥대며 다시 대합실로 가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니 내가 탈 기차는
연착되었다고 했고 지금 온 기차 역시 먼저 왔어야 하는데 연착되어서 지금 도착한 것이란다.
그 설명을 듣고 나서야 다급했던 마음이 가라 앉았고 왜 사람들이 모스크바가 아니니 다시
대합실로 가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전광판의 항목 중에서 가장 우측에 있는 것이 연착
시간이라고 했는데 25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니 25분이 늦는다는 말인듯 했다. 그리고 표에
기재된 시간보다 25분 늦었던 그 시각에 나는 제대로 기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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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게 될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일수로는 3박 4일, 시간상으로는 77시간 동안이나 타고 있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을 잘 만나야 즐거운 기차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 자리의 주변을 보니 다들 나이가 지긋한 러시아 노인분들이었다. 짐을 풀고 앉아서 좀
여유가 생기자 그들에게 간단한 러시아어로 말을 붙여 보았다. 나는 학생인데 혼자서
여행중이고 모스크바까지 가는 중이라 했더니 그때부터 그들로부터 알아 듣지도 못하는
러시아어로 질문이 쏟아졌다. 처음엔 회화집을 보며 대답을 하다가 나중엔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아 그저 웃으며 -하라쇼, 하라쇼(좋다)- 만 연발했더니 그들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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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공세가 끝났다 싶었더니 그 때부터는 나를 -까레이스키(한국인)-이라 부르며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 훈제 생선, 소시지와 케첩, 빵, 치킨, 맥주에서부터 보드카와 주스, 그리고
라면까지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다. 배가 터지게 그것들을 얻어먹고 나서 나도 내것을
나눠 먹고 싶어 땅콩과 빵, 소주, 그리고 고추장을 꺼냈다. 나는 고추장을 까레야 케첩이라며
빵에 발라서 건네 주었는데 다들 하라쇼를 연발하며 잘 드셨다. 소주는 까레야 보드카라며
한잔씩 건넸는데 다들 강한 보드카에 만성적으로 적응이 되어 그런지 맹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마셔댔다. 나는 처음에 그들이 건넨 보드카를 멋도 모르고 그들처럼 원 샷에 들이켰다가
목이 확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었는데 그 후에 소주를 마시니 나 역시 알콜의
향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지루함을 어떻게 타파할지가 무척
고민스러웠는데 친절하고 인정 많은 그분들 덕에 열차에서의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