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추운날씨에 눈이라도 내릴라 치면 꽁꽁 얼어붙은 도로, 잎마저 떨어져 앙상해진 나무와 황량한 들. 하지만 떠날 수 밖에 없는 여행길이 있다. 이 계절에 가면 더욱 감회가 새로운 곳,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무언가를 만날 수 있는 여행 말이다. 전남 벌교, 보성이 바로 그런 곳이다.


◇벌교 참꼬막 수라상 8진미 중 으뜸ㆍ쫄깃쫄깃한 맛 환상

지난 주말 겨울이여서 더 애달프게 찾고 싶었던 벌교로 향했다. 새해 들어 내린 많은 눈의 흔적이 길 내내 이어져 마음이 더 설렌다.

벌교와 마주한 득량만과 여자만의 더 넓은 바다와 갯펄이 풍요롭게 다가온다. 풍부한 갯벌에서는 천혜의 해산물을 쏟아낸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12월부터 제 맛을 발휘하는 꼬막이다. 겨울에 꼭 찾아야 하는 이유다.

미네랄이 풍부한 여자만의 개펄에서 생산되는 참꼬막은 쫄깃쫄깃하면서도 감칠맛이 나 예로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는 8진미 중 으뜸으로 꼽혔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엔 '꼬막은 크기가 밤톨만하고 껍질은 조개를 닮았다. 빛깔은 하얗고 줄 사이에는 도랑이 있으며 고깃살은 노랗고 맛이 달다'고 적었다.


벌교 꼬막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월녀가 딸 소화의 꼬막 무침을 칭찬한 대목도 한 몫했다. "워메 내새끼 꼬막 무치는 솜씨 잠 보소. 저 반달 겉은 인물에 손끝 엽렵허기가 요리 매시운디 그 인물 그 솜씨 아까워 워쩔끄나".

여자만 대포리 해변에 섰다.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꼬막 채취에 나선 아낙들이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닷바람에 맞서 회색빛 개펄로 미끌어진다.

왼쪽 무릎을 보드 모양의 뻘배에 얹고 오른발로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개펄을 박차자 뻘배가 지나간 개펄에는 골이 생긴다. 그 골 사이를 양팔을 뻗어 헤치면 갯내음 물씬 나는 쫄깃한 맛의 참꼬막이 쏟아져 나온다.

해질녘 개펄이 황금빛으로 물들면 뻘배마다 꼬막을 한가득 실은 아낙네들의 귀환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그 모습이 서정적이기도 하지만 차가운 개펄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고난한 삶을 대하는 것만 같아 뭉클함도 밀려온다.


청정해역 여자만이 일궈낸 이곳 벌교 갯벌은 모래나 황토가 섞인 여느 개펄과 달리 유독 깊고 차진 진흙벌이어서 이곳에서 잡히는 참꼬막이 그만큼 맛이 쫄깃거리고 깊다.

벌교 사람들은 '한겨울에 먹는 대포리 꼬막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자랑한다. 실제로 벌교 참꼬막은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 성분이 풍부해 간 해독은 물론 보양식으로 그만이다.

꼬막은 자연산 참꼬막과 양식된 새꼬막(똥고막) 그리고 피꼬막 세 가지로 나뉘는데 최고는 역시 참꼬막이다. 껍데기의 세로줄이 듬성듬성하고 골이 깊이 파여 있는 참꼬막은 표면에 털이 없고 쫄깃쫄깃한 맛이라야 최고로 친다.

요즘 벌교읍내에는 철을 맞아 꼬막 요리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삶은 꼬막과 회무침, 부침개 등을 하는 음식점은 늘 북새통이다.


벌교에서 꼬막만 먹고 갈 수는 없다. 벌교는 '태백산맥'의 주무대다. 지금도 소설에 등장하는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벌교의 여러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홍교(虹橋ㆍ보물 304호)다. 무지개 모양을 닮은 이 돌다리의 원래 이름이 뗏목으로 연결한 다리라는 뜻의 벌교(筏橋)였다. 마을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던 것.

또 빨치산 대장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담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합을 했던 철다리와 태백산맥 갈등의 시작점인 중도방죽 등이 소설속 모습 그대로다. 읍내에는 일제 수탈의 중심지 벌교역과 왜색 건물 그대로인 남도여관 등이 있다.

◇눈덮인 녹차밭 그림속 풍경 황홀


벌교읍에서 2번 국도를 타고 10여분 달리면 녹차로 유명한 보성이다.

사철 푸른 차밭에서 번지는 차 향에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만드는 보성은 봄의 '싱그러움', 여름의 '푸르름', 가을의 '노란 차꽃'으로 계절마다 다른 멋과 향기를 뽐낸다. 그럼 겨울풍경은 어떨까. 푸른 차나무위로 하얀 솜사탕 같은 눈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으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황홀하다.

읍내에서 율포로 이어진 18번 국도를 따라 수 많은 다원이 있다. 특히 서편제 소리꾼들이 넘어 '소리고개'로도 불리는 봇재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녹차밭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툭트인 공간이 압권이다.

봇재다원 옆 다향각에 오르면 곡선과 볼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계단식 차밭을 따라 펼쳐진 설경의 장관을 맛 볼 수 있다.


봇재고개 차밭이 툭트인 곳이면 CF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보성 최대 차밭인 대한다원은 아늑한 곳. 주차장을 지나자 눈속에 뭍힌 아름드리 삼나무 숲길이 반긴다. 하얀 솜이불을 깔아 놓은 듯한 차밭이 곡선을 그리며 파도처럼 일렁인다.

눈으로 차 향을 만끽했다면 이젠 입으로 느낄 차례. 차밭 입구 녹차방에서 차 한잔을 머금자 "차를 마시면 군자와 같이 삿 됨이 없는 맑은 성품을 갖는다"고 읊은 초의선사의 말이 차 향에 실려오는 듯 하다.

◇여행메모

△가는길=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IC로 나와 29번 국도를 따라 화순ㆍ능주를 거쳐 40분쯤 달리면 보성과 벌교다.

△볼거리=율포 해수녹차탕이 있다. 지하 120m에서 끌어올린 지하 암반 해수에다 녹차 진액을 섞은 해수탕. 탕에서 바다풍경을 볼 수 있다.봇재에는 높이 140m, 폭 150m의 녹차밭 트리와 전구 50만개, LED(발광 다이오드)전구가 밤을 밝히는 장관을 경험할 수 있다.

△먹거리=녹돈, 녹우 등 녹차음식이 많지만 대표먹거리는 꼬막. 벌교읍내에 있는 홍도회관(061)857-6259)이 유명하다. 삶은 꼬막과 부침개, 회무침, 꼬막된장국 등 각종 꼬막요리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