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틀란을 이제야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좀 의외다.

맛있는 포도주는 묵혀두는 심정인 건지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 곳의 나른함 때문인지.

어떤 사람들은 반나절에 6개의 섬을 훑고 가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섬에서 6개월을 있는 곳.

어떤 섬에서는 고독의 끝까지 내려갈 수 있고, 어떤 섬에서는 이제 이 땅에서는 드문 히피의 삶을 맛볼 수 있고,

어떤 섬에서는 자체 선착장까지 갖춘 완벽한 리조트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그런 곳.

안티구아에서 남쪽으로 1시간가량을 내려가면 아티틀란이라는, 이름도 낭만적인 호수가 있다.

파나하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보트를 타면 이 아름다운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섬에 차례로 정박하게 되는데,

각각의 섬마다 특징이 다르고 분위기도 달라서 자신이 원하는 섬에서 내리면 된다.

나는 여섯 개의 섬 중, 요가와 명상, 마사지 등으로 유명한 산 마르코스에 발을 디뎠다.

산 마르코스는 섬 전체가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이루어진데다 인적조차 드물었다. 

우거진 수풀로 뒤덮인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숙소를 겸한 레스토랑이 간간이 나왔는데,

말뚝으로 박은 팻말 없이는 방향을 찾기도 힘들 정도였고 불빛조차 흔치 않아 해가 지면 바로 한밤중 같았다.

저녁을 먹은 뒤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서는 반딧불을 보았다.

실제로 내가 보던 반딧불은 기껏해야 하나 둘씩 이었고 그나마 어릴 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기에,

가로등 불빛처럼 빛나는 반딧불 무리는 특수효과 작업을 거친 TV 광고에서나 가능한 건 줄만 알았건만,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산 마르코스의 반딧불들로 까만 어둠 속에서 불이 환했다. 마치 한밤의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캄캄한 공중에서 노란 빛들이 꼬마전구처럼 반짝거렸고, 내 바로 옆, 옷깃 위에서 깜박거릴 때는 숨죽인 탄성을 내뱉곤 했다.

이 작고 평화로운 섬에서 나는 마치 자연으로 회귀한 느낌마저 들었다.

산 마르코스에 있는 동안 밤에는 맥주 한 캔과 100원짜리 과자 봉지를 펼쳐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7시 10분이었다.

안티구아 홈스테이의 아침식사가 7시 15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온전히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진 생체시계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서인지 산 마르코스에서는 아침식사가 유난히 즐거웠고, 또 유난히도 많이 먹었다.

메뉴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있어도 후리홀레스와 쁠라따노, 치즈 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과테말라 식단을 고르곤 했다.

입맛에 잘 맞는다는 표현 이상으로 맛이 있었다. 또르띠아나 식빵에 후리홀레스에 듬뿍 찍어

진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먹는 아침식사는 하루를 시작하는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다.

세계적인 커피 생산국답게 커피도 어찌나 진하고 인심 좋게 따라주는지,

산 마르코스는 내가 본격적인 커피 마니아의 길로 빠지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정원 테이블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거나,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며 홀짝이는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은 여행에서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 되어 갔다.

숙소에서 일 이분만 걸어 나오면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여 년 전에 스리랑카에서 건너왔다가 아예 머물러 앉게 되었다는

스리랑카인 주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 라씨 한 잔을 시켰고, 차가운 라씨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일기를 썼다.

아, 이렇게 뜨거운 태양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한가로이 누워 살을 태우는 한낮의 태양.

나는 급기야 부두 위에 겉옷을 벗고 드러누웠다.

호수인데 파도 소리가 강해 눈을 감으니 해변에 누워있는 것 같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고민이 쓸모 있단 말인가.

요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상이 되는 이런 곳에서 말이다.

며칠 뒤에는 산 마르코스를 떠나 하이발리또 섬으로 옮겨왔다.

아, 여기는 점입가경! 환상이야, 환상! 나는 신세계를 발견한 기쁨에 주체할 수가 없어 방방 뛰었다.

산 마르코스가 은둔의 황홀감을 주었다면,

하이발리또의 ‘까사 델 문도’는 완벽한 휴양지가 줄 수 있는 파라다이스였다.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해서 ‘세계의 집’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인정! ‘세상의 하나뿐인 그 집’이 될 자격이 충분해.

하이발리또 섬의 벼랑 끝에 지어진 이 리조트는 그 하나로 완벽한 세계였고, 다른 세계와 마주칠 일도 전혀 없었다.

까사 델 문도는 자체 선착장을 가지고 있었고, 하이발리또 섬 안의 여행자 시설은 까사 델 문도가 유일했으며,

현지인들이 사는 곳은 절벽을 타고 섬의 반대편으로 30분 이상을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리조트는 부족한 것이 없었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없었다.

리조트 어디에서도, 테라스에서도, 방 안에서도, 식당에서도

호수와 구름이, 살포시 덮인 화산이 그림 같은 풍경처럼 펼쳐졌다. 경관이 기가 막혔다.

테라스에서는 일광욕을 즐길 수 있었고, 바로 옆으로는 다이빙 스팟이 있어 절벽 아래 시퍼런 물 아래로 다이빙을 할 수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첨벙 첨벙 뛰어드는 소리가 들리고, 얼음 같은 푸른 물 위에서 수영을 하다가 올라와서는 커다란 비치 타월에

몸을 감고 누워 다시 햇볕에 몸을 태웠다.

나무에 매달린 해먹에 몸을 감고 책을 읽었고, 목이 마르면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차가운 과일 주스를 들이켰다.

모든 계산을 체크아웃할 때 한꺼번에 하는 시스템이라 돈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책을 읽다 졸리면 그대로 해먹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게으르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여행의 일상이다.

  절벽 옆의 빨간 집이 까사 델 문도

히피 마을이 있다는 산 페드로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차마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궁금했지만 이제는 가보지 않아도 좋았다. 굳이 히피스러운 생활방식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충분히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탈문명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