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발톱이 깨져나갔다.
발바닥은 진즉에 퉁퉁 부르트고
발목이며 정강이, 허리 할 것 없이 아프고
온 몸은 화상을 입어 쓰라리니
그저 당연히 아프려니 덤덤하게 걸었는데
숙소에 와서야 보니 양말까지 피가 흥건하다.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어느새 걷고 있고
저녁이면 뒤뚱거리며 앓아대지만
아침이면 또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올레길을 걸으며
근래에 누려보지 못한 충만함을
오감으로 절절히 누리고 있다.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 올레길 3일째 일기 中 -
올레 사흘째는 서귀포로 이동했다.
다시 짐을 푼 곳은 풍림콘도 안의 올레꾼 전용 게스트하우스.
풍림콘도의 호텔같은 서비스와 잘 꾸며진 정원, 바다와 접한 탁월한 입지를
게스트하우스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곳. 투 썸즈 업!
이 곳에서 7코스 시작.
15.1km
풍림콘도는 원래 7코스의 끝점에 가깝게 있는 곳인데
워낙 대중적인 7코스인 덕에 이 곳에서는 역방향으로도 걸을 수 있게 올레표시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풍림콘도에서 7코스 거꾸로 걷기 시작.
정원을 돌아 야외 수영장을 지나고 나니,
첫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높은 곳에 있으면 ㄷㄷ 사지가 떨리는 나는
이 줄을 붙들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경사다.(라고 주장한다.)
줄을 붙잡고 바위를 기어오르는 편이
바위 사이를 뛰어내리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리라는 것을(내려가는 입장에선 줄이 거의 쓸모가 없다.)
맞은편에서 정코스로 오던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바위를 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았으며,
역방향으로 걷는 것에 대한 불길한 예감은
이 때부터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바위를 통과하고 나니 야산이 등장했다.
에로영화를 찍어도 12편은 찍을 법한 우거진 수풀 속에서
발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면 모조리 헤집고 가보았지만
파란색 표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헤매고 나니
왕개미에게 물린 일곱 방의 가려움과
온통 긁히고 찔려 따끔거리는 종아리만 남았을 뿐
나는 다시 제자리였다.
7코스 올레지기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은 후에야,
아니 솔직히 30분 더 헤매고 나서야
제대로 된 길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파란색은 눈에 띄었지만
역코스를 설명하는 노란색은 어디에도 없었고
파란색의 반대 방향으로만 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뭐, 세상은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돌고 돌고
도올고.
드디어. 마침내. 기필코.
그 모습을 드러낸
역주행 노란색 화살표.
고통과 혼란에서 나를 구할 그 아리따운 자태에
닥치고 복종
이렇게 두 표시가 함께 있는 것을 예상했는데
노란색은 그 수가 현저히 적다.
나 같은 방향치라면, 워워
파란색을 따라가세요.
제주도 여행하면,
또 스쿠터를 빼놓을 수 없지.
바닷바람 가르며
통통 달리는 스쿠터
아, 낭만적이야
해안도로를 걷다보면
물질하는 해녀, 잡아올린 해산물 손질하는 해녀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해녀
다양한 해녀 아줌씨들을 만날 수 있다.
우도에서 제주로 시집온,
출세한 미녀 해녀이신 민박집 이모님은
물질할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질적인 기후와 말씨와 문화를 가진
탐라국의 신비가 한 꺼풀 벗어내려지는 기분이었달까.
강한 태양 아래 하루종일 걷다보면
식욕이 잘 일지 않지만
거의 두 시간을 수풀에서 헤매다
정신줄이 반쯤 안드로메다로 날아간터라
건물 안으로 피신할 필요가 있었다.
오후 세 시,
혼자 먹기엔 비싼 갈칫국 대신
만만한 갈치조림
이 길이 참 좋았다.
내가 고대하던 딱 그런
호젓한 바닷길이었다.
7코스가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코스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돌개는, 그 중 큰 몫을 차지할 것이 틀림없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기억나는 딱 한 장면을 꼽으라면
유배당하던 장금이가 걸어가던 절벽길.
저 애달프게 아련한 장소는 대체 어디일까 생각했었는데.
외돌개를 정점으로
7코스 마무리
해질녘 풍경이 그리 좋대지만
안드로메다를 향해 가열차게 달려간 정신줄 탓에
일단 후퇴.
지금 필요한 것은
감자팩, 그리고
반신욕 후의 차가운 맥주 한 캔 :-)
서귀포를 아시나요
밀감 향기 풍겨 오는 가고 싶은 내 고향
칠 백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
동백꽃 송이처럼 예쁘게 핀 비바리를
콧노래도 흥겨웁게 미역 따고 밀감을 따는
그리운 내 고향 서귀포를 아시나요
수평선 돛단배가 그림 같은 내 고향
칠 백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
한라산 망아지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줄기 줄기 폭포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그리운 내 고향 서귀포를 아시나요
그 물빛 참,
곱기도 하지
마지막 나흘째는 한라산을 등반할 예정이었으나
올레가 너무 좋아진 나는
마지막 하루도 올레를 걷기로 했다.
새로 생긴 12코스도 궁금한 마음 컸으나
모두가 추천한 6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6코스를 다 걷고 7코스까지 연이어 다시 한 번 걷고 싶기도 했다.
6코스는 가장 다양한 풍경을 지닌 길이다.
오름. 바다. 폭포. 난대림, 산책로
감귤 농장, 파인애플 농장, 이중섭 갤러리.
산딸기 따먹으며 걷던 오름길
야자수가 쭉쭉빵빵
올레길엔 간식을 준비하세요.
점심 먹을 곳을 찾지 못할 수도,
더위에 밥 생각이 없을 수도 있죠.
에너지가 필요할 때
어쨌거나 출출할 때
올레길의 좋은 간식이었던 에이스.
평소에야 기겁을 할 일이지만
열량 끝내주죠. 서너 개면 충분해요.
이중섭이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한
서귀포 거주지
하지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중섭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리에 놓여있는, 질투와 동경과 안타까움으로 뒤범벅된 삶이다.
설사 내가 그와 같은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 그와 같은 삶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이중섭처럼 살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그것을 열렬히 질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삶에 대해.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바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뱃갑 은지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 황경신, 그림같은 세상 -
잠시 쉬어가던 폭포길
스니커즈 없었다면 기어갔을지도.
힘든 것도
행복한 것도 절정에 다다렀던 이 때
바위에 기대어앉아
땀을 훔치고 산들바람을 쐬며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행복해요,
이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게 참 오랜만인거 같아요."
나의 문자에 사랑하는 그 분은
너는 천상 여행을 하고 살아야겠구나,
답문을 보내셨다.
6코스 완주.
제대로 된 정신줄로
7코스 다시 시작.
6코스 14.4 km + 7코스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오후 3시.
벌써 7시간째.
온 몸이 땀에 흠씬 젖은데다
바로 이어 걷기엔 발 상태가 도저히 무리여서
6코스 종점과 7코스 시작점에 위치한 카페 솔빛바다에서
냉커피 한 잔 시키고 목을 축였다.
"거기 올레 아가씨~!"
솔빛바다 아주머니가 손짓하며 부르길래 가보니,
글쎄, 방금 부쳐낸 뜨끈뜨끈한 파전이
접시 위로 툭, 툭, 얹혀지는 게 아닌가
주변에 가득하던 관광객들 골라내고
쏙쏙 올레꾼들만 불러내 먹여주신
노릇노릇 두툼한 해물파전ㅠㅠ
올레꾼들의 든든한 지원자,
카페 솔빛바다
알고 있나요,
올레꾼인 게 자랑스러웠어요.
제주도 어디에 있든.
혼자 걷노라 하면
아이고, 힘들게 왜 걷냐면서도
그 사서 고생할만큼 이 곳이 좋으냐는
그윽하고 즐거운 눈매를
길에서도, 버스에서도, 민박집에서도
어디에서건 마주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바다 사진들
7코스를 마저 걷고 숙소에 돌아오니
온 몸이 젖은 행주 같았다.
그래도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고 즐거워
마지막 힘으로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
승리의 미소 v
우훗-
또 언제 오지?
떠나기도 전에 벌써 고민했더랬지.
마음껏 걷고
마음껏 행복했던 일주일
와인 한 잔에 사랑
다시 한 잔에 파도
또 한 잔에 그리움
나는 음주 블로깅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