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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 무늬가 되다

최근 들어 패션 컬렉션 무대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진 듯 화려해졌다. 비단 ‘스카잔’의 유행으로 그칠 일은 아닌 듯하다.

얼마 전 한 외국인 친구는 유행에 민감한 한국에서 샀다며 최신 스타일의 스카잔을 입고 나타났다. 요즘 들어 스트리트 룩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아이템 중 하나인 스카잔은 1960년대 이후 주로 일본 야쿠자, 폭주족 등이 입던 옷으로 동양적 자수가 가득 놓인 광택 소재 점퍼를 통칭한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폭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 이병헌이 입었던 스카잔을 떠올리면 될 듯.

1940년대 요코스카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점퍼에 일본 전통 문양과 부대 이름, 지역명 등을 수놓아 기념으로 가져가던 것에서 유래해 ‘스카’와 ‘점퍼’가 합쳐진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점퍼가 이색적인 건 실키한 광택 소재 위에 용이나 학, 꽃과 새 등 동양화에 자주 등장하는 문양이 더해져 같은 동양인이 봐도 동양의 느낌이 너무 강해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번 시즌은 이런 동양풍이 메가 트렌드로 떠올랐다. 루이비통, 구찌, 드리스 반 노튼 등 동시대의 패션을 대표할 만한 패션 하우스의 런웨이에 스카잔이 동원되었고, 컬렉션 전반에 동양풍이 가득하다. 비단 하이 브랜드뿐 아니라 탑샵, 자라 등 SPA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션 브랜드가 동양에 홀릭된 상태이다.

서양인에게 이런 동양풍은 이국적 감성으로 충만해 매력 그 자체다. 몇 년에 한 번씩은 오트 쿠튀르를 중심으로 동양적 무드가 오르내리지만, 생각해보면 이토록 동시다발적으로 동양에 열광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본디 패션쇼는 유럽의 레이디, 즉 소수의 귀부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봄·여름, 크루즈,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이면 VIP 고객인 귀부인들이 그것을 보고 맞춤복을 주문하거나 기성복으로 구입했다.

재클린 케네디가 영부인으로 있던 시절만 해도 미국이 파리 컬렉션에 일종의 산업 스파이를 잠입시켜 부지런히 디자인을 베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부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했고, 아시아의 연예인과 부유층이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의 주요 소비층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시아 패션 잡지 에디터, 배우들이 대거 패션쇼의 프런트 로에 진출한 지도 십여 년이 되어간다.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뮤즈 변천사를 통해서도 서양에서 동양으로 매력이 옮겨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드무아젤 샤넬과 비슷한 외모에 프랑스 여자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에서 시작해 백인 미녀의 상징과 같았던 금발의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를 거쳐 동양계로선 최초였던 데본 아오키가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2000년대 들어서 혜박 같은 순수 동양인이 런웨이에 서고, 린코 기쿠치, 리우웬, 수주 등 동양인 뮤즈가 활약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제 파리, 밀라노 컬렉션에서 동양의 유명인,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아이돌 그룹 멤버가 프런트 로에 앉는 건 당연한 일이 됐다. 2016 F/W 구찌 컬렉션에서 중국 배우 왕카이와 씨엔블루의 정용화가 나란히 동양적 자수가 놓인 슈트를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은 어색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패션계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컬렉션은 서양의 미를 동양인에게 자랑하는 행사라기보다 서양이 동양미에 찬사를 보내는 자리가 된 듯하다.

18세기 유럽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광풍이 불었다. 프랑스어로 ‘중국풍’이란 뜻으로 중국에서 고가에 들여온 도자기를 쓰던 유럽 왕가들이 아예 중국풍 도자기를 생산하고, 이것이 로코코 문화와 어우러지면서 가구, 의상, 카펫, 회화, 건축, 정원 등 생활 양식 전반에 동양풍이 번져 나간 것을 말한다.

그 때 도자기나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왕정 도자기를 보면 중국 또는 일본 전통 도자기로 착각할 만큼 청화 백자의 기법뿐 아니라 당시 동양인의 생활 양식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많다.

베르사유 궁 정원 내 ‘자기의 트리아농 궁’을 비롯해, 여러 나라 왕궁에는 시누아즈리 건축물과 장식품이 남아 있다. 지금의 시대는 어쩌면 제2 시누아즈리의 출발점이 아닌가 한다.

비록 서양인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만들어지는 면이 많지만 동양인 디자이너의 파리, 밀라노, 뉴욕 입성이 급속도로 늘고 있고, 서울 컬렉션을 비롯해 아시아 컬렉션의 위상도 높아져가고 있다. 서양 복식에 맞추던 동양인이 스스로에게서 유래한 동양풍 의상을 입고 자존감을 회복할 날도 곧 오지 않을까?

어쨌든 스카잔을 비롯한 동양풍 의상은 이 시대의 트렌드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같은 동양인이 봐도 화려한 자수, 지나치게 반짝이는 광택이 어딘가 부담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소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몸판의 바탕색이나 자수 중 한 가지 색을 골라 다른 옷에 적용하면 되기 때문.

탑샵 유니크에서 제안한 스카잔 룩은 초록색 무늬가 들어간 자수에 맞춰 초록색 니트 스웨터와 치마를 입은 것이었고, 드리스 반 노튼에서는 스카잔의 바탕색인 보라색에 맞춰 보라색 무늬가 들어간 스커트를 선보였다.

대부분 검정은 들어가기 때문에 블랙 진에 헐렁한 검정 톱, 티셔츠만 입어도 충분히 멋이 난다. 너무 캐주얼하지 않게 입으려면 치마, 원피스와 매치하는 게 좋다. 무늬가 화려한 것보다는 단색이 쉽고, 소재와 디자인은 슬립 드레스, 기계 주름 잡힌 플리츠스커트 등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거기에 길게 늘어지는 비즈 목걸이나 가죽 팔찌(심지어 스마트 워치도!), 워크 부츠 등 터프한 소품을 더해주면 금상첨화다.

우아한 꽃무늬가 펼쳐진 원피스를 입는다고 해서 그와 비슷한 카디건, 단정한 펌프스, 커피색 스타킹 등을 갖출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분위기가 전혀 다른 라이더 재킷, 데님 재킷, 스니커즈, 나막신 같은 샌들, 양말로 믹스 앤 매치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세련돼 보인다.

패션 고단수라면 곧 다가오는 여름을 맞아 리조트 웨어, 파티복으로 소화해보자. 해변에서 수영복 위에 루스하게 스카잔을 가운처럼 걸쳐도 되고 생로랑 컬렉션에 등장한 것처럼 짧은 스팽글 소재 원피스, 올인원 등을 받쳐 입으면 파티복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스니커즈, 모자와 가방 등 전반적으로 퍼져 나가는 추세이기에 소품 하나로도 충분히 동양풍 패션을 즐길 수 있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나이나 체형에 구애받지 말라는 것.

세계적 패셔니스타는 젊고 날씬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 전 다녀온 밀라노엔 뒷모습을 보면 연령대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돌아서면 지극히 현대적 방식으로 멋을 낸 중·노년 여성들이 부쩍 늘어 있었다. ‘나이 들수록 단정하고 우아하게’란 공식은 본격적으로 깨지고 있으며 그저 원하는 분위기를 즐기면 될 뿐이다.

체형이 마음에 걸려 몸을 강조하기 싫다면 브로치며 가방, 구두 등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닌 취향과 생활 방식이다. 모든 연령대 여성들이 무엇이든 입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명언처럼 패션은 즐기는 이의 것이니까.

출처 : http://media.daum.net/life/style/fashion/newsview?newsId=20160624175504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