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칼럼(대중문화) - 여성포털이지데이

나는 그다지 모난 성격이 아니다. 학창 시절에도 언제나 조용했던 아이였고, 회사에서도 다른 부서와 될 수 있으면 서로 큰 소리가 안 나오게 좋게 좋게 일처리를 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내 생각을 주장하기보다는 적당히 시류에 편승하는 길을 택하고는 한다. 시류에 편승한다는 것은 참 편하다. 어찌 되었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수결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이고, 시류에 편승한다는 것은 다수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니까.

하지만 영화에서는 나처럼 시류에 편승하는 평범한 사람보다는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외칠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을 더 주목한다. 당연한 일이다. [모리타니안]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9.11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된 슬라히를 변호하는 변호사 낸시 홀랜더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테러범을 변호한다며 반역자라고 욕하지만 그녀는 슬라히가 무죄임을 믿으며, 9.11 테러로 인하여 이성을 잃은 미국인의 광기에 맞선다. [스파이의 아내]는 1940년 태평양 전쟁 직전 만주에서 일본이 벌인 참상을 못 본척할 수 없었던 무역상 유사쿠의 이야기이다. 유사쿠가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직접 나서는 동안 평화로운 삶을 살던 아내 사토코의 일상은 점점 위태로워진다. 용기 있는 그들의 행동. 나같이 소심한 일반인들은 이렇게 영화로나마 응원하는 수밖에...

[모리타니안] - 만약 당신이 틀렸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가?

감독 : 케빈 맥도널드

주연 : 조디 포스터, 쉐일린 우들리, 타하르 라힘, 베네딕트 컴버배치

쿠바의 미군 기지 내에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 이곳에 수감되어 있는 모하메두 슬라히(타하르 라힘)은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는 물론 재판도 없이 6년 동안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미 정부는 슬라히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길 원하며 냉철한 군 검찰관 카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내세우고, 베테랑 인권 변호사 낸시(조디 포스터)와 동료 테리(쉐일린 우들리)는 슬라히의 변호를 맡으며 카우치와 맞서게 된다. 하지만 국가 기밀이라는 미명 아래 슬라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은폐된 상황. 카우치도, 낸시도, 슬라히의 사건에 미정부가 감추려 했던 또 다른 이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카우치가 변절자 소리를 들으며 사건에서 손을 떼는 사이, 낸시는 슬라히에 대한 모든 혐의가 조작된 것임을 미국 법정에서 밝혀내 슬라히에 대한 무죄를 이끈다.

미국의 현대사는 9.11 테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 쌍둥이 빌딩과 워싱ㅌ천의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다발 자살 테러 사건인 9.11 테러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미국인 테러의 배후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모리타니안]에서 슬라히는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의심받는데,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그는 죽어 마땅한 악마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기소는 물론 재판도 없이 6년 동안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온갖 고문이 그에게 가해져 거짓 진술서에 사인을 하게끔 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수호자라고 자칭하는 미국에서 버젓이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은 9.11 테러범이라면 그렇게 당해도 싸다고 말한다. 9.11 테러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법치주의를 훼손해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미국 국민들에겐 이성을 마비시키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낸시는 질문한다. 만약 당신네들이 틀렸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과거에 자신이 옳다고 믿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낸시의 질문에 카우치는 대답을 못한다. 카우치는 슬라히가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9.11 테러로 인하여 친구를 잃은 그는 친구의 아내에게 법으로 정의의 복수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슬라히의 모든 혐의가 거짓이라면... 그것은 카우치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모리타니안]에서 가장 용감한 캐릭터는 카우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슬라히에게 행해진 군당국의 고문 사실을 알게 되고, 사건에서 스스로 손을 뗀다. 만약 그가 용기가 없었다면 슬라히가 비록 고문을 받았지만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라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우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모리타니안]은 꽤 잔잔한 영화이다. 슬라히가 받았을 고된 고문은 아주 잠깐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다. 모두가 꺼리는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 변호를 맡으며 낸시가 겪어야 했을 온갖 비난과 고충도 영화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저 법정에 들어가면서 시위대에 가로막히는 한 장면만이 등장할 뿐이다. 진실을 받아들인 카우치가 이후 군 당국과 이웃들에게 반역자 낙인이 찍히는 장면도 없다. 뭐랄까 분명 자극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지만 케빈 맥도널드 감독은 그저 담담하게 슬라히에 대한 진실을 영화 속에 구현했을 뿐이다.

아마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이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장편 다큐멘터리 [원 데이 인 셉템버]를 통해 72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으며, [터칭 더 보이드]. [세나 : F1의 신화], [라이프 인 어 데이], [말리], [휘트니] 등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꾸준히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모리타니안]이 담담한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느껴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모리타니안]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사건에 함께 분노를 표출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틀렸다면, 당신은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가? 9.11 테러라는 전 세계가 공분한 거대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한 남자의 진실을 통해 케빈 맥도널드 감독은 담담하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스파이의 아내] - 국가의 이익과 인류의 보편적 정의 사이에서의 당신의 선택은?

감독 : 구로사와 기요시

주연 : 아오이 유우, 타카하시 잇세이

전운이 감돌던 1940년 일본.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행복하게 살던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사업차 만주에 갔다가 일본 정부가 벌이는 엄청난 만행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유사쿠를 수상하게 여긴 군 당국은 유사쿠를 감시하기 시작하고, 남편의 위험한 계획을 알게 된 사토코도 유사쿠를 말린다. 그러나 사토코는 결국 유사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일본의 만행이 담긴 필름을 가지고 미국으로 밀항을 하려는 사토코. 하지만 누군가의 신고로 체포된다. 그녀의 밀항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유사쿠 뿐인데... 과연 누가 그리고 왜 그녀를 신고한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개인의 안위보다 국가의 이익을 더 우선시한다. 전쟁에서 지면 패전국의 국민으로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시에는 개인의 인권은 무시되고, 승전을 위해 온갖 비윤리적인 국가의 범죄가 암묵적인 동의를 얻게 된다. [스파이의 아내]는 바로 그러한 전시에서 국가의 비윤리적인 범죄를 목격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포로들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한 유사쿠. 일본 정부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작은 희생 따위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사쿠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에겐 일본의 이익보다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가 더욱 소중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 유사쿠의 선택은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당장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도 '우리는 매국노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며 반대를 한다. 유사쿠가 일본의 만행을 미국에서 폭로하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미국도 결국 일본을 적으로 삼아 참전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패전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토코는 '당신의 신념 때문에 우리 동포가 수십만 명이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냐?'라며 따진다. 유사쿠는 어차피 이 전쟁은 일본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며 자신의 행동은 패전을 앞당기는 것뿐이라고 말하지만 사토코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스파이의 아내]에서 공감이 되는 것은 유사쿠보다는 사토코의 반응이다. 당연하다.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통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토코 입장에서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라는 변명거리도 있다. 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내 행복이 무너져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유사쿠는 자신의 신념을 꺾으려 하지 않고, 결국 사토코도 유사쿠를 따르기로 한다. 사실 사토코의 행복은 유사쿠의 사랑에 비롯된 것이기에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토코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토코의 선택이 흥미롭다. 그녀는 유사쿠와 함께 만주의 만행을 목격하고 군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는 유사쿠의 조카를 밀고한다. 사토코에게 밀고자라며 비난을 퍼붓는 유사쿠에게 사토코는 냉정하게 말한다. 큰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라고. 사토코의 밀고로 인하여 유사쿠에 대한 감시를 소홀해진 틈을 타서 사토코는 유사쿠와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 그런데 그러한 변명은 만주에서 생체 실험을 한 일본의 변명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사토코도 결국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된다.

과연 사토코를 밀고한 유사쿠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매국노가 되어 타국을 떠도는 것보다 군 당국에 체포되어 일본에 남는 것이 사토코를 위한 길이라고 여긴 것일까? 아니면 사토코가 그랬던 것처럼 군 당국이 사코토를 체포하는 동안 자신은 안전하게 일본을 떠나기 위한 방책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토코 또한 대의를 위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일본이 포로들에게 생체실험을 하며 했던 변명처럼, 사토코가 유사쿠의 조카를 밀고하면서 했던 변명처럼,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사토코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1945년 일본은 패망한다. 전쟁이 끝난 후 사토코는 유사쿠의 사망 확인서를 받게 되지만 위조된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얼마나 사토코는 미국으로 떠난다. 그래서 과연 사토코와 유사쿠는 미국에서 재회를 했을까? 유사쿠와 재회한 사토코는 왜 자신을 밀고했는지 물어봤을까? 이 모든 결말은 알 수 없다. 단지 남은 것은 인류의 정의를 위해 조국을 배신한 한 남자의 굳건한 신념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한 여자의 안타까운 사랑만 있을 뿐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77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과연 [스파이의 아내]를 본 일본의 관객들이 유사쿠의 신념에 박수를 보냈을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