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칼럼(대중문화) - 여성포털이지데이

지난 추석은 주말까지 끼어서 무려 5일간의 연휴였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친척 왕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야외로 나들이를 갈 수도 없었으니 5일간의 연휴 동안 나는 집에서만 뒹굴어야 했다. 물론 올해의 추석은 이럴 것이라 미리 예상을 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철저하게 준비를 마친 후 연휴를 맞이했다. 나의 준비는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볼 영화를 Seezn에서 미리 다운로드하는 것. 그리고 테마도 정해놓았다. 동양 영화를 볼 것. 이렇게 테마를 정해 놓으니 딱 네 편의 영화가 추석 연휴 동안 나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 - 독특함을 기대한 나에겐 너무나도 평범한 판타지 로맨스

감독 : 유아사 마사아키

더빙 : 카타요세 료타, 카와에이 리나

네 편의 동양 영화라고는 하지만 막상 다운로드를 하고 나니 일본 영화 두 편, 중국 영화 두 편이었다. 좀 더 다양한 동양 영화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 공개되는 동양 영화가 한정되어 있으니... 그래도 굳이 내가 동양 영화로 테마를 잡은 이유는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나에게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은 개봉 당시 극장 관람을 고민했을 정도로 기대작이었다. 특히 독특한 애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감독 작품이라 더욱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은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히나코(키와에이 리나)와 정의감 넘치는 소방관 미나토(카타요세 료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미나토는 파도에 휩쓸린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실의에 빠진 히나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히나코가 두 사람만의 추억이 담긴 노래를 부르면 물속에서 미나토가 나타나는 것. 손을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지만 미나토의 존재 덕분에 히나코는 미나토의 죽음 이후 관두었던 파도를 다시 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순수한 사랑과 판타지한 설정이 잘 어우러져 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연인이 추억이 담긴 노래를 부르면 물속에서 나타나다니... 참 일본스러운 설정이다. 죽어서도 히나코의 곁을 지켜주는 미나토 덕분에 히나코는 큰 용기를 얻게 되고, 결국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 정도면 영화를 보는 동안 코끝이 찡한 감동을 한 번쯤은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솔직히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은 기대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일단 가장 큰 문제가 히나코와 미나토의 추억이 담긴 노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강점은 음악에 있다. 영화의 서정적 분위기가 슬픈 음악과 만나 감동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내곤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의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특히 영화의 설정상 주제곡인 'Brand New Story'는 반복해서 영화에 나오는데, 솔직히 나에겐 별 감흥이 없었다.

영화 후반 무단으로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히나코의 장면은 조금 억지스럽기까지 했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을 굳이 몰래 쫓아가 증거로 사진을 찍겠다면 오지랖을 펼치다가 위험에 빠지다니...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과하게 연출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마지막의 크리스마스 장면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무단 불꽃놀이 사고도 그렇고,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 초반 부분에 너무나도 친절하게 스포를 깔아 놓은 것이 오히려 내겐 역효과였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독특한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차기작이라서 내가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에 독특한 로맨스 판타지를 너무 기대한 것 같다.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은 분명 평균 이상의 로맨스 판타지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이미 독특한 로맨스 판타지를 기대한 내 눈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로맨스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느껴졌다.

[초능력소년사건] - 이것이 진정 [크로니클]의 리메이크란 말이더냐?

감독 : 채수응

주연 : 동청밍, 진의함, 주아휘

비록 [너와 파도를 탈수 있다면]은 기대보다 실망스러웠지만 지난 추석 연휴 동안 본 네 편의 영화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었다. 그리고 가장 재미없었던 영화를 한 편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초능력소년사건]을 선택할 것이다. [초능력소년사건]은 2012년 국내 개봉했던 조쉬 트랭크 감독의 저예산 SF 영화 [크로니클]의 리메이크 영화라서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그 실망 또한 어마어마했다.

[초능력소년사건]은 우연한 사고로 초능력을 갖게 된 소심한 대학생 청밍(동청밍)과 훼이(주아휘), 그리고 린(진의함)의 이야기이다.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청밍에게 훼이는 초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벌자며 꼬드긴다. 이에 청밍은 훼이와 함께 현금 수송차를 터는 등 자신의 초능력을 범죄에 이용하게 되지만, 그가 초능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기억도 잠차 사라지는 부작용을 겪는다. 결국 초능력의 부작용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청밍. 그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갈취한 훼이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훼이 또한 초능력을 감추고 있었다.

[크로니클]은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초능력소년사건]도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크로니클]이 개봉했던 2012년만 하더라도 페이크 다큐가 SF 장르에 쓰였다는 점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초능력소년사건]이 개봉한 2020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초능력소년사건]을 보는 내내 차라리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버리고 우연히 초능력을 갖게 된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초능력소년사건]이 페이크 다큐에 집착하는 바람에 영화의 전개는 굉장히 조잡해졌다. 청밍이 들고 다니는 핸드폰 영상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모든 것이 띄엄띄엄인데, SF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특수효과 장면부터 시작해서 점차 자신의 초능력을 악용하기 시작하는 청밍의 감정 변화, 그리고 청밍과 린의 사랑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그려진 것이 없다.

가장 어이가 없었던 것은 훼이의 능력이 드러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사람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훼이는 거리의 사람들을 조종하여 복수를 하러 온 청밍을 막으려 한다. 그런데 훼이에게 조종당하는 사람들이 연기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긴장감은커녕 실웃음만 터져 나왔다. 청밍이 거대한 배를 염력으로 이동시키는 장면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장면인데 페이크 다큐로 흐릿하게 처리되어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실 추석 연휴에 보려고 다운로드하면서 나의 궁극적인 목적인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아들은 내가 다운로드한 네 편의 영화를 흝어 본 후 [초능력소년사건]을 선택했으나 10분 정도만 본 후 '아빠, 이건 아닌 것 같아요.'라며 바로 포기하더라. 그래서 나중에 나 혼자 [초능력소년사건]을 봐야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아들에게 '너의 선택은 아주 적절했어.'라는 한 마디를 남겨야만 했다. 정말 이 좋은 소재로 영화를 이렇게밖에 만들지 못하다니...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으라차차! 마이 러브] - 신종 다이어트 사기극

감독 : 미야와키 료

주연 : 강지영, 쿠사카와 타투야, 카네코 다이치

내가 국내 극장 개봉조차 하지 않은 [으라차차! 마이 러브]를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걸그룹 '카라' 출신의 배우 강지영이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카라'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고, 강지영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녀가 '카라'를 그만두고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2015년작 [암살교실]도 아직 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왠지 [으라차차! 마이 러브]는 묘하게 끌렸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목장집 딸, 뚱녀 아야네(강지영)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구해준 선배 하야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가 대차게 차인다. 그 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피부 관리실 원장의 조언에 따라 이탈리아까지 건너가지만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날씬한 미녀가 되어 버린 것.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아야네는 피부 관리실에서 일을 하다가 평소 동경하던 인기 아이돌 타쿠미(쿠사카와 타투아)와 만나게 되고, 급기야 타쿠미는 아야네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데...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일본 영화 특유의 과장된 표정 연기가 난무할 것이고, 뚱녀가 날씬한 미녀로 변신하여 꿈에 그리던 사랑에 성공하지만 과거 때문에 위기를 맞이한다는 스토리 전개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으라차차! 마이 러브]는 그렇게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서 영화가 진행되니 특별히 재미있다고 열광할 필요도, 재미없다고 야유를 보낼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럴 줄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볍다는 점이다. 일단 아야네가 뚱녀에서 늘씬한 미녀가 되는 과정이 그렇다. 영화에서는 사고로 인하여 위 절개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절개 수술을 받아 이렇게 날씬한 미녀가 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획기적인 다이어트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차라리 어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 아야네가 날씬한 미녀가 되었다는 설정이 더 낫지 않았을까?

아야네와 타쿠미의 사랑도 얼렁뚱땅이다. 이 영화대로라면 그저 아야네의 마사지 기술에 반한 것 밖에 안되는데 과연 이 둘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해도 될는지 아리송하다. 아야네가 뚱뚱했던 과거 때문에 위기를 맞이하는 장면도 영화에서는 대충 그려진다. 영화가 뭔가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저 뚱뚱했던 아야네가 인기 아이돌 타쿠미와 사랑에 빠진다는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 판타지로만 영화를 억지로 끌고 간다.

[으라차차! 마이 러브]와 비슷한 전개의 영화 2006년 개봉작 [미녀는 괴로워]와 비교해보면 [으라차차! 마이 러브]가 얼마나 대충 만든 영화인지 알 수가 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풍자와 같은 이런 유의 영화에서 기대할만한 요소들은 모두 배제된 채 [으라차차! 마이 러브]는 그저 가벼운 로맨스로 끌고 간다. 충분히 예상은 했지만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가벼웠던 영화였다.

[에베레스트] - 국가의 명예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했던 시절

감독 : 이인항

주연 : 오경, 장쯔이

나는 산악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도전을 위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산악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심금을 울린다. 2015년에 개봉한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의 [에베레스트]와 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도 극장에서 챙겨봤다. 이인항 감독의 [에베레스트]는 중국의 국뽕 영화라는 혹평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추석 연휴에 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순전히 산악 영화이기 때문이다.

1960년 '에베레스트' 최정상 정복을 눈앞에 둔 중국의 등반대는 예측불허의 사고로 인하여 동료와 증거를 남길 카메라 중 단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포기한 방오주(오경). 하지만 그로 인하여 중국 등반대의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은 세계에 인정받지 못하고, 그로 인한 상실감에 오주는 방황한다. 15년 후, 중국은 다시 한번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을 선언하고, 방오주를 비롯한 15년 전 대원들은 물론 500여 명의 대원들이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이라는 목적 아래 뭉친다. 연인이자 기상학자인 서영(장쯔이)의 도움으로 방오주는 다시 한번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의 꿈을 이루지만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마주하게 된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에베레스트]는 [으라차차! 마이 러브]와 비슷하다. 물론 영화의 장르, 내용, 스케일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관객을 감동시키려 할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에베레스트]가 과도한 중국식 국뽕으로 흐른다고 해서 나는 이 영화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동할 생각도 없다. 그저 영화가 끝난 후 내게 남는 것은 과연 국가의 명예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의문뿐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1975년이다. 당시는 냉전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이고, 공산국가인 중국 또한 자국의 위대함을 선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에베레스트' 최정상 등반은 딱 좋은 소재였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해 전국에서 소집된 수많은 청년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중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를 했고, 중국은 희생당한 그들을 영웅이라 칭송했다. 이 모든 것은 1975년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시절의 이야기가 냉전 시대가 끝난지 오래된 2020년에 공개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혹시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선택으로 인하여 도전하고 그 도전 끝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국가에 선동되어 도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내가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의 [에베레스트]와 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를 보며 눈물을 흘렸지만 이인항 감독의 [에베레스트]를 보면서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다 죽음을 당한 중국의 등반대는 전쟁터로 끌려가 의미 없는 총알받이가 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성룡의 장면은 오글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그땐 그랬다. 우리나라도 군사정권 시절 독재자의 말 한마디에 생과 사를 오고 갔고, 그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포장되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그 무엇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기에 이인항 감독의 [에베레스트]를 보며 나는 아무런 영화적 재미,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땐 그랬지.'라는 한탄만은 느껴졌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니 조금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