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칼럼(대중문화) - 여성포털이지데이

감독 : 김한결

주연 : 김래원, 공효진

엉망이 되도록 술에 취한 기분

나는 술에 취하면 과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한계치에 도달하면 구토를 하고, 귀소 본능이 발동한다. 나와 오래된 친구들은 각자 주사가 다르다. 한 친구는 시비를 걸고 싸우고, 다른 친구는 엉엉 운다. 이렇게 친구들이 각각 주사가 있다 보니 술이 가장 센 친구가 뒤치다꺼리를 하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엉망이 될 때까지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집에서 도끼눈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내가 무섭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결혼하면 철이 든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천절을 맞이하여 꿀맛 같은 휴일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 마무리는 역시나 영화가 책임졌다. 나는 미리 [가장 보통의 연애]를 예매했고, 반강제적으로 아내를 끌고 극장으로 향했다. 아내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 제목이 뭔데?"라고 물었고, 나는 "응, 공효진 나오는 영화야."라며 설명을 마쳤다. 요즘 아내가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기에 공효진이라는 이름은 재미의 보증수표와도 같다. 그리고 다행히 그러한 내 전략이 아내에게 잘 통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더라. [가장 보통의 연애]에서는 술 마시는 장면과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장면이 거의 8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이다. 술 마시는 장면이 얼마나 많이 나오던지,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는데 영화를 본 것이 아닌 술을 진탕 마신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꿈까지 꿨다. 건강검진에서 간 기능 저하, 요산 수치 높음 판정을 받아 요즘 술을 자제하고 있는데, [가장 보통의 연애] 덕분에 젊은 시절처럼 엉망이 되도록 술에 취하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남자의 사정

[가장 보통의 연애]는 어느 광고 회사의 팀장인 재훈(김래원)이 술에 취해 전 여친 수정(손여은)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니? 에서부터 시작해서 보고 싶다,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등등 극장 안 여성 관객들의 자그마한 야유 소리를 들릴 정도로 재훈은 개진상 짓을 한다. 사실 그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수정과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 놓은 상황에서 재훈은 우연히 수정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목격하고, 결국 파혼까지 당한 것이다.

물론 잘못은 수정이 했다. 하지만 약자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재훈은 다시는 수정에게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술에만 취하면 받지도 않는 수정에게 전화를 수십 번 하고, 문자도 수십 개를 보낸다. 젊은 시절 나도 해봐서 안다. 관계가 끝난 것은 끝난 것이다. 아무리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도 끝난 관계가 다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재훈이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정하는 순간 더 괴로워질 테니까...

그런데 재훈 앞에 새로운 팀원으로 선영(공효진)이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신입사원 환영 회식날 선영의 전남친 동화(지일주)가 선영에게 매달리는 꼴사나운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선영은 동화를 매몰차게 대한다. 아마도 재훈은 선영에게서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에 답장도 해주지 않는 매몰찬 수정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 여자의 사정

전 직장에서 남자 문제로 사직을 하게 된 선영은 새로운 직장에서 새 출발하고자 한다. 하지만 하필 출근 첫날, 그것도 자신의 환영 회식날 전남친 동화가 찾아온다. 모든 직원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 하지만 선영은 동화를 다시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는 바람을 피웠고, 바람을 피운 상대는 언제든지 또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선영은 동화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정리한다. 문제는 새로운 직장에서 또다시 남자 문제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화 문제로 마음이 복잡한데 새벽에 재훈에게서 전화가 온다. 술에 잔뜩 취한 재훈은 선영에게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고, 팀장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선영은 재훈의 전화를 받아준다. 직장인의 비애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고, 일과 개인 생활에 대한 경계가 분명해졌다고 하지만 직장 상사의 전화를 생까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특히 신입 사원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사실 선영에게는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전 직장에서 유부남인 팀장이 자꾸 찝쩍대자 선영은 팀장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식사 몇 번 같이 했고, 팀장의 부인이 외도를 의심해서 난동을 피우는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팀장은 선영이 먼저 꼬리를 쳤다고 증언했고, 그로 인하여 선영은 회사를 관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선영은 당연히 재훈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작부터 재훈과 선영의 관계는 삐거덕거린다.

서로 다른 듯 결국 같은 두 사람

사연만 놓고 본다면 재훈과 선영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헤어진 전여친에게 매달리는 재훈과 매달리는 전남친에게 매몰찬 선영. 두 사람은 서로 물과 기름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닮았다. 사랑에 상처받았고,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모습이 같다. 그리고 술로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 하는 것까지도 두 사람은 같다.

모든 로맨틱 코미디가 그러하듯이 재훈과 선영은 처음엔 티격태격하지만 점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다. 물론 중간에 서로 원하지 않는 이별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결국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커플이 된다. 이건 거의 모든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이고, [가장 보통의 연애] 또한 이 법칙을 충실하게 따른다. 하지만 그 과정이 범상치 않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에 술이 끼어드니 두 사람의 사랑은 다른 사랑과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의 주인공은 어쩌면 술이다. 재훈은 술을 마시며 선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선영 역시 술을 마시며 재훈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다시 서로에게 서먹하게 대한다. 그러다가 다시 술을 마시면서 관계가 진행되는... 이 영화의 모든 사랑과 관계는 술에 의해 진행된다. 결국 주인공이 술이다 보니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재훈과 선영의 모습에 관객들은 유쾌하게 웃을 수 있다. 맨정신이라면 할 수 없는 진상 짓을 재훈과 선영은 술에 취해 자연스럽게 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보통의 연애]의 영화적 재미는 그렇게 완성된다.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전개를 보이지만 술 덕분에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는 전혀 다른 웃음을 안겨주는 방식으로...

만약 이 사랑이 현실에서 진행된다면?

몇 년 전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창립 이래 처음으로 성희롱 사건이 벌어졌었다. 영업부의 노총각 팀장이 나이가 어린 여직원에게 노골적으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하지만 여직원은 단호하게 거부를 했고, 그것으로 끝이 났다면 이 사건은 조용히 덮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옛 속담을 믿었던 노총각 팀장은 포기하지 않고 구애 작전을 펼쳤고, 결국 참다못한 여직원은 회사에 성희롱으로 고발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당시 회사의 분위기는 그냥 남녀 간의 일이니 우리가 상관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결국 회사에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자 여직원은 사직서를 내고 나갔다.

나는 이 사건을 회사에서 너무 안일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 여직원 입장에서는 직장 상사의 구애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힘들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일해야 하니 더욱도 그랬을 텐데, 아무도 그러한 여직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가장 보통의 연애]를 보니 그때의 여직원 생각이 났다. 선영 또한 재훈에게 마음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마음이 없었다면 밤늦게 술에 취해 문자를 보내고 만나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이건 성희롱에 해당된다.

주말에 직원 화합을 위해 등산을 계획하는 회사 대표 관수(정웅인), 선영을 왕따시키고 자기네들끼리 선영의 험담을 하는 동료 직원들, [가장 보통의 연애]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만약 현실에서 만났다면 최악일 수밖에 없는 개진상들이다. 영화니까 웃으며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부디 이 영화를 본 후 나도 사내 연애 한번 해보겠다고 따라 했다가는 성희롱으로 고발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들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명대사... 사랑의 비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