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팀 버튼
주연 : 콜린 파렐, 마이클 키튼, 대니 드비토, 에바 그린
78년 만에 리메이크를 한 이유?
큰 귀를 펄럭이며 하늘을 나는 아기 코끼리 '덤보'가 78년 만에 실사 영화로 만들어졌다. 솔직히 나는 [덤보]의 영화 제작 소식에 디즈니가 너무 돈독에 오른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무려 일곱 번 하고도 여덟 번째 변할 즈음에 이제 와서 리메이크라니, 이건 좀 너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메가폰을 팀 버튼 감독이 잡는다는 소식에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덤보]를 보기 전에 1941년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덤보]를 먼저 봤다. 애니메이션 [덤보]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영화의 러닝 타임이 고작 1시간 4분이라는 점이었다. 1941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1시간 남짓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TV 시리즈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극장 개봉용 장편 영화들이 최소한 1시간 30분 이상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 짧다 보니 애니메이션 [덤보]는 아주 간략한 이야기만 전하고 서둘러 끝나버렸다. 큰 귀 때문에 놀림을 당하던 아기 코끼리 '덤보'가 큰 귀를 이용해서 하늘을 나름으로써 서커스단의 스타가 된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과연 너무나도 간단한 '덤보'의 이야기를 팀 버튼 감독은 어떻게 1시간 51분짜리 영화로 만들어냈을까? [덤보]를 보기 위해 온 가족이 극장으로 향하며 품었던 공통의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의문은 영화가 시작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풀려 버렸다. 1941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커스단의 스타가 된 '덤보'는 정말 행복했을까?"라는 질문이다.
1941년 애니메이션 '덤보'는 정말 행복했을까?
다시 1941년 애니메이션 [덤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덤보'는 태어나서부터 큰 귀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 바보, 멍청이라는 뜻을 가진 '덤보'라는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덤보'의 진짜 이름은 점보 주니어이다.) 그런 '덤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엄마 코끼리인 점보 부인이다. 하지만 점보 부인은 '덤보'를 조롱하는 인간들에게서 '덤보'를 지키기 위해 난동을 피우다가 미친 코끼리로 낙인이 찍혀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렇기에 '덤보'에게 있어서 유일한 행복은 다시 점보 부인과 함께 하는 것뿐이다.
'덤보'가 하늘을 나름으로써 꿈은 이루어진다. 이제 그 누구도 스타가 된 '덤보'를 놀릴 수 없으며, '덤보'와 점보 부인을 떨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애니메이션 [덤보]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결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덤보'는 하늘을 날으며 서커스단의 스타가 되었지만 과연 진정으로 행복했을까? 물론 당장은 놀림을 당하지 않고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서커스 단장은 하늘을 나는 묘기를 선보인 '덤보'를 이용해서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점점 강도가 센 묘기를 강요했을 것이고, 서커스 단장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또다시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덤보'는 서커스 단장이 시키는 대로 힘겨운 묘기를 부렸을 것이다. 결국 '덤보' 덕분에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돈을 쓸어 담게 된 못된 서커스 단장이었을 것이다. 팀 버튼 감독은 이렇게 인간 중심적인 '덤보'의 해피엔딩을 78년 만에 손본 것이다.
향수를 자극하는 초반부
영화의 초반은 애니메이션 [덤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황새가 아기 코끼리를 점보 부인에게 선물하는 장면이라던가, 생쥐 티머시 가 '덤보'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장면, 심술궂은 동료 코끼리들, 처음엔 '덤보'를 놀렸다가 나중엔 '덤보'가 하늘을 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까마귀 장면 등은 생략되었다. 이들 장면은 너무 만화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버튼 감독은 원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영화 초반, 굳이 없어도 상관이 없는 황새 장면과 서커스단의 생쥐를 잠시 출연시킨다. 큰 분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갑더라.
생쥐 티모시의 역할은 밀리(니코 파커)와 조(핀리 호빈스)라는 두 아역 캐릭터로 대체된다. 밀리와 조 남매는 티머시 가 그랬던 것처럼 놀림을 당하는 '덤보'의 친구가 되어주면서, '덤보'에게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밀리와 조의 노력 덕분에 '덤보'는 하늘을 나는 코끼리로 유명세를 치르면서 서커스단의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사실 '덤보'와 밀리, 조는 닮은 점이 많다. '덤보'가 서커스단에서 난동을 피운 엄마 코끼리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밀리와 조 역시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 비록 전쟁에서 아빠인 홀트(콜린 퍼스)가 돌아왔지만 한쪽 팔을 잃어 무기력해진 홀트는 밀리와 조의 좋은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밀리와 조는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 코끼리와 헤어진 '덤보'를 위해 헌신적으로 돕는다. 티모시에겐 없던 '덤보'를 돕는 동기가 밀리와 조에겐 생긴 것이다. 이렇듯 애니메이션 [덤보]와 분명 달라졌지만 '덤보'가 하늘을 날며 스타가 되는 과정까지는 근본적으로 달리진 것은 없다.
돈이 되지 않는 꿈은 버려진다.
밀리와 조의 도움으로 멋지게 하늘을 날게 된 '덤보'는 이제 서커스단의 스타가 된다. 이 상황에서 서커스 단장인 맥스 메디치(대니 드비토)가 엄마 코끼리를 다시 '덤보'의 곁으로 데려오면 애니메이션 [덤보]와 똑같은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엄마 코끼리 대신 '덤보'에게 접근한 것은 돈 냄새를 맡은 거물급 사업가 반데비어(마이클 키튼) 뿐이다.
반데비어의 등장과 더불어 [덤보]는 애니메이션 [덤보]의 틀을 깨고 나온다. 반데비어는 서커스단이 관객을 찾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서커스단을 찾아오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반데비어의 계획이 실제로 실현된 곳이 바로 디즈니랜드이다. 영화 속, 반데비어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꿈의 나라 드림랜드는 마치 디즈니랜드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참 묘하다. '덤보'의 인기 덕분에 맥스 메디치는 반데비어의 동업자가 될 수 있었고, 메디치의 서커스 단원들은 드림랜드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환상이다. 반데비어는 꿈을 돈으로 환산했고, 조금이라도 적자가 난다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꿈을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반데비어에게 있어서 돈이 되는 꿈은 하늘을 나는 아기 코끼리 '덤보'일뿐이다. 메디치의 다른 서커스 단원들은 반데비어 입장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 코끼리를 '덤보'에게 되돌려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치 21세기 폭스를 인수한 디즈니가 대규모 정리해고를 하고 있는 현 상황처럼 메디치의 서커스 단원들은 하루아침에 드림랜드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덤보'의 진짜 해피엔딩
결국 팀 버튼 감독은 애니메이션 [덤보]를 78년 만에 리메이크하면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덤보'는 스타가 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역경의 시작이다. 반데비어는 하늘을 나는 아기 코끼리 '덤보'에 만족하지 않고 매력적인 공중 곡예사 콜레트(에바 그린)를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나는 공연을 기획한다. 만약 이 공연이 성공을 거둔다면 '덤보'의 등에 타는 것은 콜레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중은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덤보'의 등에 타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애니메이션 [덤보]가 관객에게 건넨 해피엔딩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밀리와 조, 그리고 반데비어에게 버림을 받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메디치 서커스 단원들은 '덤보'의 탈출을 계획한다. '덤보'를 더 이상 서커스를 위해 하늘을 억지로 날지 않아도 되는 세상, 즉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그것이 78년 만에 바뀐 '덤보'의 진짜 해피엔딩이다. 애니메이션 [덤보]를 보며 마지막 장면에서 찝찝함을 느낀 나는 팀 버튼 감독의 [덤보]를 보며 진정한 행복을 찾은 '덤보'의 모습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불타오르는 드림랜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메디치 서커스 단원들, 그리고 영화라는 과학의 등장, 영화 후반에 벌어진 이 모든 것이 나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동물을 학대하면서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장면에서는 영화에 대한 팀 버튼 감독의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덤보]는 78년 만에 해피엔딩을 바꾸어 놓았다. 이쯤되면 그 오랜 세월을 건너 뛰어 리메이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