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제이슨 라이트맨
주연 : 샤를리즈 테론, 맥켄지 데이비스
결혼 후 내가 아내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은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실언을 한 일이다. 당시 나는 회사 일에 지쳐 있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내게 아내는 이제 갓 태어난 아들의 육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차갑게 말했다.
"너는 사랑스러운 아기와 하루 종일 보내지만, 나는 지긋지긋한 직장 상사와 하루 종일 보낸다. 그러니 나에 비해 네가 훨씬 행복한 거 아니냐? 나는 집에서라도 쉬어야겠으니 내 휴식을 망치지 말아 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대답이 너무나도 형편없어 얼굴이 화끈해진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그땐 정말 육아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내가 초보 엄마이듯 나 역시 초보 아빠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하게라도 안다. 직장 상사는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지도 않고, 그래도 말이라도 알아듣지만, 이제 갓 태어난 아기는 하루 종일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지긋지긋한 직장 상사와 하루 종일 보내는 것보다 사랑스러운 아기와 하루 종일 보내는 것이 더 힘들다는 사실을 말이다.
[툴리]는 10대 미혼모 이야기를 밝은 분위기 속에 담아낸 [주노], 정리해고 전문가의 이야기를 로맨틱 코미디 속에 풀어낸 [인 디 에어] 등 작지만 사랑스러운 영화를 주로 연출한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의 신작이다. 이번에 그가 할 이야기는 육아에 대해서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셋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이제 여덟 살인 첫째 딸 사라는 마를로가 모든 것을 챙겨줘야 하고, 둘째 아들 조나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셋째 딸까지 출산했으니 그녀의 일상이 엉망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남편인 드류(론 리빙스턴)은 육아를 전적으로 마를로에게만 맡긴다. 물론 그가 15년 전의 나처럼 실언을 일삼는 나쁜 남편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러하듯이 적당히 무관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를로는 오빠가 추천해준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고용한다. 야간 보모란 저녁부터 아침까지 아기를 돌봐주며 엄마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는데, 낯선 여자에게 아기를 맡기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마를로는 툴리로 인하여 모든 상황이 나아지자 점점 툴리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후 영화의 반전 공개)
야간 보모... 얼핏 레베카 드 모네이의 섬찟한 연기가 돋보였던 1992년 개봉작 [요람을 흔드는 손]이 생각나기도 한다. 실제 마를로 역시 오빠에게 야간 보모를 기용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를로는 이와 비슷한 걱정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다. 하지만 [툴리]는 결코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툴리]는 야간 보모 툴리로 인하여 점점 변해가는 마를로를 비춰준다. 첫째 딸 사라와 함께 가라오케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마를로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누군가와 육아의 부담을 나누는 것만으로 변해가는 마를로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특히 툴리가 드류의 성적 판타지를 이뤄주며 유혹하는 장면에서 나는 툴리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마를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툴리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툴리가 기용되고 나서 밤새 집안 청소가 말끔히 되어 있고, 조나의 반 아이들을 위한 대량의 컵케이크가 만들어져 있는 장면에서 나는 헷갈렸다. 만약 툴리가 가상의 존재라면 누가 밤새 청소를 했고, 누가 밤새 그 많은 컵케이크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 대답은 영화의 마지막에 담겨 있다.
툴리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며 마를로와 시내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마를로와 툴리는 야밤에 술 한 잔 마시자며 먼 브루클린까지 가는데, 브루클린은 마를로가 처녀 시절을 보냈던 동네이다. 마를로는 자유로웠던 처녀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음주운전 사고가 나고 마를로의 처녀시절 성이 툴리임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툴리는 마를로가 만들어낸 환상의 존재임이 드러난다. 육아에 지친 마를로는 야간 보모 툴리라는 자신의 처녀 시절의 존재를 마음속으로 만들어냈고, 밤이 되면 툴리가 되어 완벽한 슈퍼맘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인 2역을 해야 하는 마를로의 몸은 이미 극심한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건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의 아내와 내 주변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이다. 결국 육아는 어머니만의 책임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거들어야 할 문제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무심함을 깨닫고 조금씩 변해가는 드류의 모습에서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툴리]는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의 이전작처럼 인상 깊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다는 느낌이다. 툴리가 마를로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임을 영화 끝까지 숨겼어야 하지만, 솔직히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은 그런 깜짝 반전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 [툴리]는 말한다. 이제 우리 모두가 툴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어머니들에게 툴리의 역할까지 짊어지게 한다면 마를로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과부하가 걸릴 테니, 남편이, 그리고 가족들이, 더 나아가서는 국가가 툴리의 역할을 해줘야 한다. 분명 그것이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금발의 미녀에 불과했던 데뷔 초를 벗어나 샤를리즈 테론은 2004년 개봉작 [몬스터]에서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이라는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했었고, 최근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를 통해 강렬한 여전사를 연기하기도 했다. 이번 [툴리]에서는 갓 출산하여 마를로를 연기하는데, 정말 샤를리즈 테론이 맞나 싶을 정도로 펑퍼짐한 몸매 망가짐을 보여준다. 그런데 잊지 말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어머니들도 처녀 시절 날씬한 몸매가 아기 출산 후 마를로처럼 펑퍼짐해졌음을... 그건 결코 망가짐이 아니라 희생이 아닐까? [툴리]를 보고 나니 15년전 내 실언이 다시 한번 부끄러워졌고, 힘든 육아를 견뎌낸 아내가 대단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