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 개발자와 결혼한 기획자. 워낙 생각의 차이가 커서 IT 업계에서 불화의 대명사와 같은 이 관계를, 나는 가정에서도 끌어안고 있다. 생활의 밀접함으로 볼 때 개발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습관을 빠삭하게 이해할 법도 하지만, 개발자와 일하며 숱한 순간을 아리송해하고 조마조마해하는 건 나도 여느 기획자들과 다를 게 없다.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며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은 있지만, 평소 아버지나 남편과의 대화는 일보다는 일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 개발자를 두고 있다는 건, 그들을 이해할 가능성이 조금 많을 뿐이다. 다른 개발자들에게는 물어볼 수 없던 것들을 가족에겐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편하게 물어볼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기획자와 개발자 사이라고 해도 모두 동일한 관계일 수야 없지만, 대개 비슷한 문제들을 겪는 것 같다. 가장 흔한 것이 업무에 사용하는 용어가 확연히 다른 직군끼리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들이다. 개발자들의 용어가 일상언어와 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기획자가 개발자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효율적이다. 기획자 입장에서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협업하는 직군으로서 이런 노력도 기획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발자도 자신이 무심코 사용하는 개발 언어를 비개발직군을 배려하며 이야기하는 노력을 한다면 더 수월해지겠지만.
같이 살아도 해소되지 않는 개발자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이 책을 들었다. 일본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보니, 일본의 업무환경에 맞춰져 있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나름 의역을 해 놓긴 했지만 실제 우리나라 IT 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환경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용어 설명에 있어서도 저자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질문받은 단어들을 설명하고 있어 공감이 덜 간다. 많이 쓰이는 용어들도 너무 기초적인 것들이 많아, 이 책만으로는 이해를 높이긴 어렵다. 이런 용어를 쓰는구나 정도를 인지할 수 있는 수준. 특히 은어로 쓰이는 것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발자들의 업무 스타일을 참고하고 어떤 방식으로 개발자와 협업하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은 새겨 읽을 만하다. 개발자들이 한 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개개인의 성향은 천차만별이지만, 기획자끼리 공유하는 성향이 있듯 개발자들도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 참고가 되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책 말미에 수록된 국내 실무자의 조언은 피부에 와 닿는다. 원저자나 부록의 국내 실무자나 입을 모아 말하는 건 용어에 대한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질문. 다만 이 책에서 언급된 용어들은 너무 기초적이라 실무에서 물어보았다간 오히려 난처해지지 않을까 싶다. 경험상 즉시 묻기보다는 스스로 공부하는 태도가 필요해 보인다. 가장 안전한 건 검색의 생활화. 업무마다 특수성이 있으니 검색이 잘 되지 않는다면, 선배 기획자들에게 먼저 물어보고 그래도 답이 모호하다면 담당 개발자에게 조심스레 물어보는 게 최선일 것 같다. 노력하는 기획자에게 야박한 개발자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믿으며.
기획자가 기술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고 불가능한 기술을 전제로 작성한 명세서는 헛된 망상을 적어놓은 노트에 불과합니다. (P. 35)
프로그래머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계기를 주는 동료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P. 42)
사람들은 '다음 주'라고 들으면 '금방이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1년은 52주밖에 없습니다. '그건 다음 주에'라고 말한 시점에서 1년의 2%라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P. 48)
여러분은 프로그래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못 알아듣겠다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궁금한 것은 바로 해결하도록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프로그래머와 의사소통이 원활해질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P. 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