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제로의 특징 下
- 의외성과 우연성을 지닌다 -
사기꾼들이 왜 설득력이 뛰어날까?
보통 사람들은 권위를 내세우면 대부분 껌벅 죽는다. 권위 있는 사람의 언행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괜히 스스로 주눅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기꾼들은 권위를 이용하여 먼저 상대방의 기를 꺾는다. 그들은 자신이 내세울만한 권위가 있다면 최대한 내세우고 없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서 권위를 세운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전문가임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전문가라고 사칭을 하여 신뢰도를 최대한 높인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종교나 사회단체를 이용해 자신이 아주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 준다.
그 다음은 상대방을 홀릴 차례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거나, 상대의 약점을 파악해 최대한 이용한다. 그리고 자신을 과대포장해서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 다음 자신감을 보이면서 상대방에게 확신을 심어 준다. 이 과정들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공감능력이나 양심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려야 한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의 공감능력은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이들이 사기 치기 위해 잘 이용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의외성’과 ‘우연성’이다.
우리가 만나지 말아야 할 이성을 만나거나 사기를 당할 때 의외로 잘 먹히는 전략이다. 우연을 가장하지만 이미 먹잇감을 정해놓은 맹수처럼 모든 계획 하에 접근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나 사기꾼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이런 전략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싶을 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 여기서 또 만나네. 이런 우연이 있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 아주머니가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오랫동안 진료를 받았다. 부부치료를 위해 남편과 동행했는데 남편의 외모는 호남형에 머리가 벗겨진 그냥 동네 아저씨 같았다. 그는 면담에서 어떻게 여자를 유혹하는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를 J라고 부르자.
“일단 목표물을 정해요. 가급적이면 여러 명 정하는 게 좋아요. 실패하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 목표물의 동선과 잘 가는 곳을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이제 가급적 좋은 옷을 입고 깔끔하게 단장을 해요. 또 되도록이면 뭔가 큰돈을 만지는 것처럼 잘 꾸미면 더 좋아요. 그러고 나서는 자꾸 부딪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얼굴이 익혀지잖아요. 그러면 간단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겁니다. 대략 10명 중 6~7명은 어색해하지만 인사를 받아 줘요. 반은 성공한 거지요. 다음에 만나면 가벼운 농담이나 자기소개 같은 걸 해요. 아니면 ‘혹시 어디에 계시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반응해 주면 게임은 거의 끝난 겁니다. 그 말은 예쁘고 매력이 있어서 지켜봤다고 말해 달라는 뜻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눈에 띄었다고 말해 주고 다음에 저녁 한번 같이 하자고 한 뒤 실행에 옮기면 되요. 잘 안 될 것 같고 들킬까 봐 불안하시죠? 배짱이 있어야 되요. 안 되면 다음 여자로 넘어가면 되요. 그리고 들킬까 봐 걱정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사는 아파트 바로 밑에 있는 술집에서 다른 여자와 술 먹는 것 상상도 안 되시죠?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해요.”
J가 선보인 방법은 설득의 전략에서 ‘문전걸치기’ 기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문을 열기만 하면 발을 걸쳐 닫지 못하게 하면서 설득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멀쩡한 사람들이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가서 인생의 오점을 남기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이 인연이나 운명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서 얼마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다 알 것이다. 문제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이런 믿음을 쉽게 가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며 깊이 사랑할수록 이건 보통의 만남이 아니라고 믿기 쉽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 사이에 깊은 신뢰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믿음이라고 생각되지만, 안타깝게도 사이코패스들의 눈에는 사람들의 약한 고리로 보여 너무나 이용하기 쉬운 특성일 뿐이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인 강호순이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바로 우연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의 버스 정류장에서 대상을 물색했다. 물론 그곳의 지리는 이미 모두 파악해 두었으며 여성들이 어느 방향으로 주로 가는지 조사를 다 해두었다. 그리고 좋은 차에 비싸 보이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영락없는 사업가로 보이도록 꾸며 신뢰도를 높였다.
그러고는 목표한 여성 앞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과 조수석 모두 창을 내렸다. 실내가 어두우면 경계심을 더 쉽게 가지므로 일부러 밝게 해서 경계심을 풀었다. 여자들이 가장 많이 가는 방향으로 길을 묻고는 방향이 같으면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혹시라도 주저하면 초행길이라 길을 잘 몰라서 그런다고 둘러댄다. 버스가 드문드문 오는 시골의 정류장에서 기다림에 지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을 즈음에, 인상 좋고 매너 좋으면서 게다가 돈까지 있어 보이는 남자가 길을 가르쳐 줄 겸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는데 주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 당신은 단호하게 “아니, 됐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이 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요?”를 외치고 고마운 마음으로 차에 오른다. 그렇게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불투명하다면, 우리 뇌는 에너지가 많이 드는 논리적인 생각을 포기하고 무의식적인 빠른 길을 택한다. 이 사람은 인상이나 옷을 보면 괜찮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타서 내 방의 따뜻한 침대로 한시라도 빨리 뛰어들도록 부추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논리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큰 에너지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평소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강호순이 체포된 뒤에도 그의 이웃이 뭐라고 한 줄 아는가?
“나는 강호순을 믿어요. 얼마나 착하게 생겼어요.”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뇌는 이처럼 고집스럽다. 한 번 생긴 인상이나 믿음을 여간해서는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운명을 믿지 말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설령 운명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토록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현명하게 잘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운명이라고 무턱대고 믿기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감능력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