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래빗홀

2014.8.21~9.6/130분/대학로예술극장소극장/만7세~/30,000/8.21

2006년 토니어워즈 5개 부문 노미네이트

2006년 퓰리처상 수상

2011년 니콜 키드먼 주연 영화화

2006년 데이빗 린제이의 연극 '래빗홀'이 뉴욕을 강타했다.

코미디 장르 연극을 써온 린제이의 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관객들에게 큰 울림과 감동, 그리고 깊은 여운을 주었다.

예측하지 못한 불행한 사고를 겪은 후

상실감에 시달리는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이지만

같은 소재를 다룬 기존 작품들의 스타일과는 달랐다.

괴롭고 슬픈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현명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그들이 마주하는 상황과 반응들은

실제 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아프고 힘들면서도 어느 순간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담은 이 연극은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감동을 전하며

토니상에 노미네이트되고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는 영예를 안았다.

교통사고로 4살된 아들 대니를 떠나보낸 베카와 하위 부부.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내려 노력하지만, 서로 어긋나기만 한다.

아이를 가졌지만, 마냥 축복받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베카의 동새 이지.

10년 전 아들을 떠나보낸 베카의 엄마 냇.

그리고 대니를 치이게 한 당사자, 17세 소년 제이슨.

어느 날, 제이슨이 대니에게 바치고 싶다며

공상과학소설 '래빗홀'을 써서 베카에게 보내오는데...

      
(사진: 인터파크)

생각보다 퍽 넓은 예술극장 소극장. 대극장만큼의 크기.

대극장은 올려보는 구조. 소극장은 내려보는 구조.
한 젊은 부부의 집 안, 세 공간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황들.

베카와 이지

5분만에 명확한 캐릭터를 보이는 이지. 생각도 깊지 않고 남 생각도 잘 안하고

미래를 위한 생각도 별로 없는 거칠고 기 쎈 동생 이지와 이성적 언니 베카.

이 거침 없는 성격의 동생이 언니의 눈치를 보며 얼떨결에 털어놓은 임신사실.

언니인 자신에게 임신사실을 털어놓기 어려워한 동생에게 화가 나면서도

축하해주는 베카.  "어떻게 하면 맥도널드에서도 짤릴 수 있니?"

모범적이고 강박적인 예술가적 기질의 예민한 언니와 천방지축 동생.

베카와 하위

거실. 신경쇠약이 느껴질 정도의 베카. 말꼬리를 무는 다툼들. 폭풍전야.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를 할퀴게 되는 부부.

집에 돌아와 아들의 존재를 비디오테잎과 아들의 물건으로 추억하는 아빠와

하루 종일 집안 어디에 가든 떠오르는 아들의 존재때문에 고통스러운 엄마.

냉장고에 붙인 아들의 그림을 떼고, 아들의 옷을 기부하려 정리하는,

아들과의 추억이 깃든 집에서 이사하자하는 아내를 받아들이 힘든 남편,

실수로 아들의 모습이 녹화된 단 하나의 테잎이 지워지자

아내의 의도를 의심하면서 터져나온 두 사람의 상처.

"모르겠어" 이 말만큼 두 사람의 심리를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실제 대부분의 부부들이 헤어지게 되는 고비인 순간을 잘 전달해준다.

냇과 베카

누군가의 "죽음"을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워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케네디가의 죽음을 논하며,

끝내 거침없이  아들과 손주의 죽음을 동격으로 취급하는 거침없는 엄마.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의 다른 자세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부모모임을 갖지 않고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을 질색하는 베카와

종교의 힘을 빌어서라도 딸이 위안을 찾았으면 하는 엄마.

비난할 대상도 타당한 이유도 찾지 못한 부부의 아픔이 다시 다가온다.

"사람들이 그러지. 하느님이 천사가 필요했나봐~라고.

  왜? 하느님이잖아. 천사가 필요하면 하나 만들면되지, 왜?"

그렇게 무언가의 힘에 기대어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자기를 위해, 

고통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끔찍하게 싫은 베카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손주의 장난감을 닦아 구분하며 수다떨다가..

다시 손주의 신발을 가슴에 안고 오열하는 냇.

상처가 오래 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간 베카와 하위에게 찾아오게 될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베카는 다르다 부르짖었던 동생과 아들의 죽음에서 벗어나

아들을 잃은 같은 엄마로써의 대화를 통해 엄마에게 위로 받는다.

"엄마...사라질까? 이게..?"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그 깊은 속에서 기어올라오게 되고

 주머니 속에 벽돌처럼 지니게 될만큼의 무게가 돼. 그러다 깜빡 잊게도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손을 집어 넣고 느끼게 돼.. 그게 좋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그냥 그것마저 없으면 안될 것 같은?..그런 거.."

베카와 제이슨

베카와 제이슨의 이야기로 위안을 받았는지에 대한 장면은 없었지만,

오픈하우스에서 하위의 태도가 제이슨에게 화낸 게 아니라 강조하는 베카.

이렇게 고의아닌 사고의 당사자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는 것은

문화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제이슨의 졸업파티얘기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베카.

자신의 아들이 겪었어야 할 고교 졸업, 졸업 파티, 대학 진학.

당연히 여기던 것들에 대한 상실감. 그것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주체못할 슬픔.

"그럼 우주에 수많은 내가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수도 있단 얘기네?"

"네. 충분히 가능하죠. 과학을 믿으신다면요.."

"그럼...난 그 수많은 버전 중 하나의 슬픈 버전일 뿐이겠네?"

말은 하지 않았어도, 래빗홀을 찾아 가볼 수 없지만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대니가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 베카의 마음 아니었을까...?

다시 베카와 하위

부모모임에서 뭔가를 찾으려 했던 하위가 부모모임을 그만두기로 한다.

혼자의 힘으로 겪고자하는 용기를 찾은 것이다.

베카도 이사를 포기한다.  곳곳에 서린 추억을, 외면하고픈 고통이 아닌

아프지만 추억으로 받아들이고자하는 용기를 찾은 것이다.

사고 이후 오랫동안 소원했던 친구부부와의 다가오는 만남에 대해 말하며

조금은 담담하게 아들의 또래였던 그 부부의 아이 생일과 선물도 말한다.

타즈(개)가 조용한 것이 자신이 수면제를 먹여서 그렇다고 농담하는 베카와

진짜인 줄 알고 놀랬다가 그 모습에 웃음을 참는 베카를 따라 웃는 하위.

극이 시작한 뒤 그들은 처음으로 조금쯤은 대니의 무게를 내려놓고 웃는다.

-비난할 무언가를 찾지 않고 해 내는 아름다운 용서-

사람도 자신의 존재의 영위가 일차적인 목표일 수 밖에 없는 동물이기에

이런 일 앞에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비난할 대상을 찾아내거나,

타당한 이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특히나 유교문화가 뿌리깊은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중년이상의 사람들에겐

"미망인"이나  "남편 잡아먹은 여자" "아들 잡아먹은 여자"란 말이 들려지니..

고의도 아니었고 충분히 괴로움과 나름의 자책을 표현하고 있지만,

자신의 아들을 치이게 한 제이슨과 마주섰을 때

하위의 본능적이며 통제하기 힘든 분노를 누가 이해할 수 없을까..

하지만 "그 애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 해 줬지?"라고 물어보는

하위에게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혼을 느낄 수 있다.

바로...부모의 영혼. 제이슨도 누군가의 아들이니..

고의성여부와 상관없이 복수라는 지극히 본능적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고의성이 없는 자를 용서하거나, 심지어 고의성이 있는 자까지도 용서하는

숭고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다시 미래의 첫 장을 열다-

삶을 살다 우리가 만나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일 앞에서, 오늘 출연한 두 배우를 만났던 소년B의 집에서처럼,

끊임없이 타당한 이유와 자신을 포함한 비난할 대상을 찾으려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의 모습과 좀 더 닮았다 느껴지는데..

다른 문화의 이들 역시

전화 받으러 집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울타리 문을 제대로 닫아두었더라면..

엄마 험담하려고 전화 걸지 않았더라면..

하고 자신의 행동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괴로워한다.

물론 일부의 사람은 그 상처가 아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로가 위로가 되어준다면,

때론 그 추억의 무게도 견딜 수 있게 되는,

흉터는 남지만 상처는 낫는 언젠가는 오게 되어있다..라고

나즈막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첫 공인줄도 모르고 20분이나 더 진행된 극을 보고 나와 지쳤다.

스토리도 그렇지만, 상처와 싸우는 팽팽했던 모습들에 절로 긴장했었나보다.

역시 오랫만에 만났지만 이항나님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강애심님의 다른 모습의 엄마 연기도 반갑고 훌륭했다.

유화로 경계선 정확하지 않은 그림 뭉글뭉글 그려낸 느낌에 대비되어

4B연필로 사진처럼 정교한 인물화나 정물화를 그려낸 듯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심리표현을 잘 연출해 냈지만,

감정이 지칠 정도의 130분은 좀 길었다.

기획:한국공연예술센터&조은컴퍼니 / 제작:조은컴퍼니 / 작:데이비드 린제이 어베어

번역:성수정 / 연출:김제훈 / 무.감:박민호 / 무대디자인:이윤수 / 음악:이영배 

출연:강애심(냇), 이항나(베카), 송영근(하위), 전수아(이지), 이기현(제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