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선호하는 장르가 있다. 추리, 미스터리는 소설이나 영화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오싹한 것을 일부러 시간을 내서까지 느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 작가를 통해 장르에 대한 편견을 극복했다. 이 장르의 소재들이란 현실에서 빌려오는 경우가 많다. 성폭행, 살인, 폭력, 죽음, 세상사의 모든 악은 이런 장르의 발전에 기여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귀재다. 속도감이나 이야기의 반전을 통해 독자의 혼을 빼 놓는 것은 기본이다. 거기에 또 한가지 이 작가만의 장점이 있다. 이야기와 인물에 독특한 감성을 불어넣는다. 캐릭터에 집중해 매력적이고 따뜻한 인물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에 기반하고 있다.
신파적 요소가 다분한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특별함이 없다. 평범한 요리재료를 가지고 맛을 낼 수 있었던 요인은 오직 창조된 인물들이 내뿜고 있는 `공감의 마력' 덕분이다. 하여,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과연 `내가 딸아이를 잃어버린 그 아버지라면?' 혹은 `내가 그 아버지를 뒤쫓고 있는 형사라면?' 이런 질문과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순도 백프로의 공감을 선물한다. 하여, 잔혹한 복수극에서 핏방울은 눈물로 뒤바뀐다. 관객이 캐릭터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게임 끝이다 ! 그 역할을 배우 정재영과 이성민은 진정성 있는 연기로 잘 소화해 냈다.
아내를 병마로 잃고 중학생인 외동딸과 함께 살아가는 아빠 이상현(정재영)은 방직공장에 다니며 일에 찌들어 산다. 언젠가 딸아이와 함께 TV를 보다 아이는 지나가는 말로 아빠에게 스키장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아빠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지극히 궁색하다. "그럼 돈은 누가 벌구?" 딸아이는 일에 찌들어 사는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게 무관심이 아닌 것을 알기에 딸아이는 아빠를 이해하고 있다. 그런 순박한 딸아이는 동네의 껄렁한 고교생들에게 납치된다. 그들은 아이에게 마약을 먹이고 성폭행을 하고, 결국 죽게 한다.
공장에서 일하다 영문을 모른 채 형사의 전화에 불려간 상현은 영안실 입구에서 형사들에게 화를 내며 시신의 확인을 거부한다. " 내가 왜 왜 모르는 사람 얼굴을 확인해요 내가 ! " 상현의 분노와 부정의 감정이 표출되는 이 대사 뒤에, 형사 장억관(이성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고 만다. " 따님 맞습니다 " 그리고 고백한다. " 형사 생활 17년 동안 피해자 가족들에게 해주는 말은 하나도 변함이 없어, 그저 참아야 한다고" 아빠 이상현은 법률이 금지하고 있는 `자력구제'의 길로 나아간다. 딸아이를 죽게 한, 두 명의 고교생을 자기 손으로 벌하는 것이다. 우리 법률이 자력구제를 금하는 것은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법과 피해자들이 느끼는 `법감정'의 괴리는 심각하다.
상현이 자력구제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피해자가 아닌 용의자로 신분이 바뀐다. 장억관은 상현을 위로하고 세상의 법이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 경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영화는 자력구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아빠의 고뇌와 슬픔, 또 그런 아빠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그를 잡아야만 하는 형사의 이중적인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형사 억관의 파트너인 젊은 형사 김상구(서준영)는 "내가 그 아버지라도 죽여버렸을 거예요" "왜 우리가 이런 새끼들을 보호해야 하는 거지"라는 대사를 통해 정의롭고 공평한 법은 존재하지 않고, 국민의 법감정에 한참 부족하기만 법의 구제 능력을 문제삼는다.
상현은 우리 시대의 평범한 아빠였다. 그는 남을 이유없이 탓해본적도 없다. 회사에서 상사의 `뒷담화'에서조차 끼어들기 조심스러워하는 인물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딸 아이를 사랑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상현은 억관에게 고백한다. "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남은 인생은 없습니다 " 제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다던 300여명에 가까운 꽃같이 밝고 아름다웠을 아이들이 차디찬 바다 속에 잠겨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믿을 수 없고 잔혹한 2014년 대한민국의 봄이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관객 그 누구라도 세월호의 부모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를 성폭행으로 잃은 아버지 상현이 삶을 포기하고, 배고픔과 통증, 추위를 참아내고, 오직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설산을 `방황하는' 씬들이 영화 후반부를 점령하고 있다.
상현에겐 "남은 인생 따윈 의미가 없다" 그는 하여, 자신을 파괴할 자력구제의 길로 들어선다. 차라리 그는 이 참혹한 세월호의 부모들 보다는 더 `행복한 부모'인지 모른다. 세월호의 부모들은 그 깊은 절망과 고통의 시간들을 지금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가? 그들에겐 `자력구제'의 길도 그 누군가를 향해 항의할 자유도 없다. 어제, 여당의 최고위원이란 자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좌파들이 정부전복 작전을 개시할 것' 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말 뜻은 간단하다. 세월호 사건에 관해, 정부를 비판하는 모두 사람은 `종북좌파'이니 `입 다물고 가만 있으라'는 것이다. 우습다. 안으로 삭히고, 참고, 인내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다 인가?
영안실에 들어가 딸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길 거부하는 그 아빠의 심정, 그 부모의 본능에 공감한다. 미성년자란 이유로 사람을 죽여놓고도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을 용의자들에게 대한 피해자의 분노에 공감한다. 언제나 피해자는 참고 참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여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주인공 상현의 인간적 고뇌에 공감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세월호의 자식잃은 부모들'이 되어보지 않고는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이란 단어를 함부로 쓸 수 없다. 공감은 제 3 자의 여유가 묻어나는 단어다. 우리는 아직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다. 여기저기 지뢰들이 많고 다행히 우리는 그 지뢰들을 잘 피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어느날 우리가 `그들'이 되는 순간, 그 몹쓸일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 삶은 어떻게 뒤바뀔지 예측할 수 없다. 소시민이자 살가웠던 아빠 상현은 아이의 죽음 후에, 다시는 웃음도 기쁨도 느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살지만, 살고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지금, 숨막히게 고통스런 그 시간, 공감과 위로란 말은 차라리 사치다.
개츠비의 영화읽기 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