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 2014 이정호 감독
◇ 명대사 : "범죄에 애, 어른이 어딨어. 자식을 잃은 부모한테 남은 인생 같은 건 없어."
영화 < 방황하는 칼날 >의 소재는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파격적인 소재가 아닙니다. 청소년 성범죄, 미성년자에게 유독 처벌이 약한 법치를 대신해서 '복수'에 나서는 피해자 부모들의 이야기는 이미 < 돈크라이 마미> <공정 사회> 등에서 봐왔으니까요. 그럼 이제 새로울 것 없는 소재를 흥미롭게 하기 위해 좀 다른 각도로 다가가야만 했을텐데요.
이 영화에서도 중학생 딸을 성폭행으로 무참하게 잃은 아버지 상현(정재영 역)이 있습니다. 경찰은 "기다리라고, 그게 최선이이다"라고 할 뿐이죠. 이런 상황에서 딸이 처참히 죽는 동영상을 목격한 아버지가 범인을 직접 응징한 일은 너무도 이해가 가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심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법적으로 살해 용의자인 상현을 쫒을 수 밖에 없는 형사 억관(이상민 분)의 대결 구도가 있습니다.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미약한 처벌에 그치는 부조리한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상현이 아니라 사건을 맡은 경찰들입니다. "내가 상현이라도 직접 범인을 죽였을 것"이라고 소신을 밝히는 경찰 현수(서준영 역)가 있는가 하면 "나는 개인적으로 저런 놈들은 다 죽어도 된다고 생각해"라는 강릉경찰서 경찰도 있죠. 다혈질 형사 억관은 겉으로는 상현이 복수를 멈추길 바라지만 속으로는 상현의 복수를 이해합니다. 상부의 명령으로 상현을 체포해야 하는 현실의 부조리함이 미치게 답답하죠.
이 영화 < 방황하는 칼날 >이 지금까지 다뤼진 청소년 성범죄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이런 부분이었습니다. 딸을 잃은 사적 복수의 통쾌함보다 딸을 잃은 '피해자'인 상현이 범인을 죽인 '가해자'가 되는 양면성에 대해 판단하게 하고, 상현은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죽이기 위해 추격하고, 이런 상현을 이해하는 형사 억관도 범인을 잡기 위해 추격합니다. 범인을 잡으려는 의지는 둘 다 같지만 목적은 다르죠. 상현은 복수를 위해, 억관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 추격을 펼치면서 또 하나의 딜레마를 던집니다.
상현은 아버지로서 할 만한 복수를 하지만 법에 어긋나는 사회적 악행인 범죄자가 되어 가고 있고, 억관은 이런 상현이 복수를 멈추길 바라며 청소년 범죄자를 보호해야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복수행각을 이해하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리고 가해자가 된 피해자이고..
성폭력 가해자인 청소년 두식은 상현의 복수에 법으로 보호받아야 하고, 상황과 판단이 점점 모호해져가요.
법을 대신해 복수하는 상현의 칼날도 방황하지만 상현의 복수를 막기 위한 억관의 칼날도 방황해요. 상현의 부정(父情)과 형식적인 법치주의의 무능함. 어느 것이 진정한 정의인가?
이처럼 < 방황하는 칼날 >은 이런 청소년 범죄를 소재로 자극적인 핏빛 복수가 아닌 철학적인 고민들로 가득 채웁니다. 복수의 자극적인 설정보다 형식적 법치주의의 모순이 두드러지는 영화예요.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지겹도록 ) 등장인물들과 주변인물들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는 긴박하게 이야기에 몰입감을 주는 대신 느슨한 함정에 빠져버리죠. 이런 자극적인 소재의 사회문제작임에도 후반부엔 졸음까지 왔습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상현과 억관의 대립이 너무 상현에게 온정적으로 치우쳐 이미 관객의 감정적인 몰표 투표는 끝나 버렸고, 두식을 쫒는 과정에서의 긴박감도 부족해 이 영화의 중요한 흥미요소인 첨예한 대결구도를 그려내지 못했던 탓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이중적인 심리와 철학적 주제를 엮어서 묘사하는데 탁월해서 좋아하는 작가인데, 일본 특유의 정서을 잘 담아 내서인지 우리나라에서 영화하 하면 그 참맛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 용의자 x >도 , < 백야행 >도 그러했고 이제 < 방황하는 칼날 >도 연기자들의 깊이 있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그 참맛을 살려내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 수록 캐릭터들이 대사로 심리를 전달하는 세련되지 못한 연출력이나 매력없는 밋밋한 수렁에 빠져서 깊이 침잠해 버렸습니다.(zz~)
끝장면 즈음에 다시 졸음이 물러났어요.
끝장면이 그래도 식상하지 않아서 기억에 남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죠.
상현이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범인 중 하나인 얼굴도 모르는 두식을 쫒아요. 스키장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죠. 도주중에 크게 다친 상현의 다리를 보며 두식이 그래요,
"아저씨.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다리를 잘라내야 한다"며 진심어린 걱정을 하죠.
다음 날은 상현이 두식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왜 그랬냐"고 물어요.
두식은 "그냥"이라고 대답해요.
이 부분이 꽤 인상적이예요. 넋놓고 있다가 뒤통수 맞은 기분이랄까요.
두식이라는 존재는 '선'도 아니지만 '악' 그 자체도 아닌 그냥 무감각하고 무개념하지만 다른 사람을 걱정할 줄도 아는 평범한 이중성을 가진 인간으로 보여지면서 띵~한 뒷통수 맞기!!
( 이 부분은 영화를 보고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 영화를 좀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
상현은 " 너 같은 자식하고 같은 하늘에서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 라고 절규하죠..
그리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악한 마음은 왜 생기는 걸까요, 그리고 그 악한 마음은 주변을 아프게 하고 왜 이렇게 파급효과가 큰 걸까요.
"그냥"이라는 말이 참 뒤죽박죽 세상의 여러 모습을 읽게 만듭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남은 것은 소재가 사회문제작이다..
'청소년을 살해한 아버지가 나쁘냐, 성폭행 범죄자 청소년이 더 나쁘냐?' 라는 쓸데없이 소모적인 물음이 뭔 소용이냐란 생각?
빨리 법이 좀 더 실효성 있게 바뀌어야 할텐데..라는 늘 상 느끼지만 곧 현실의 뒤켠으로 밀려날 생각들의 파편 몇 조각과 피로감이 남았던 영화였습니다.
영화 < 방황하는 칼날 >에 깊이 있는 철학적 내용을 담고 싶어 했는데,
글쎄요.. 이 영화를 식상하지 않게 해주는 건 정재영과 이성민의 진지하고 훌륭한 연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밋밋한 연출력이라 영화적 몰입감과 흥미를 위해서 좀 더 긴밤감 있는 연출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
영화 자체는 썩 몰입감이 훌륭하거나 신선한 연출력은 엿볼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