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기거할 때 일이다.
나처럼 아침 9시면 매일 같이 출근도장을 찍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70대는 족히 넘어보이는 나이에, 낡고 낡아 소매 뿐만 아니라, 상의 전체에
담쟁이 덩쿨처럼 보풀로 뒤덮여있던 베이지색 쟈켓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도 그 옷을 기억하는 건, 그 옷이 단 한 번도 바뀐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다 입을 수 있는 계절을 타지 않는 그런 옷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때로는 동양고전을 읽었고, 때로는 서양 역사서를 읽었다.
또 때로는 소설도 읽고, 사회과학 서적도 읽고, 자연과학 서적도 읽었다.
가끔 자리에 안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향토문학관이라는 곳에서 책을 읽고 계셨다.
언제부터인가 그 할아버지와 내가 경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가 더 도서관에 오래 앉아 있는지. 아마 그 할아버지는 나를 의식하지 않았을 터이나
나는 그 할아버지를 의식했다. 그렇게 매일 그 할아버지와 함께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저녁10시가 될 때까지 책을 읽었다.
청춘(靑春)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이미 나의 승리는 기정사실화 돼 있었다.
체력, 집중력, 시력. 어느 것 하나 내가 뒤질 게 없었다.
사실 10시간 정도 책을 읽고 있으면, 눈알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15시간 정도 읽으면, 눈앞에 뿌연 성에가 낀다.
20대 초반의 젊은 내가 그럴 정도였으니, 70대 노인이 겪는 고통은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허나 그 할아버지 역시 화장실 가는 시간과
식사 시간을 빼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독서의 목적이 다를지라도, 매일 같이 보는 사이가 되니,
어느 덧 서로를 인식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인사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시공간에 공존(共存)하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공존(共尊)하는 사이로 발전해 갈 즈음.
언제인가부터 할아버지가 조금씩 일찍 퇴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퇴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결근도 하더니,
어느샌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할아버지의 그림자와 책은 보이지 않았다.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할아버지는 지기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책을 벗삼아, 책과 대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책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대화도 필요했을 터.
할아버지가 떠난 도서관 열람실 한 켠은 이상하게 공기가 무거웠고,
생기도 예전만 못했다.
책을 읽으며,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왜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을까.'
할아버지의 '책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
"노인이 된 느낌이 궁금하다면, 먼지 낀 안경을 쓰고
귀를 솜으로 틀어막은 뒤 커다랗고 무거운 신을 신고
장갑을 낀 채 정상적으로 하루를 보내보라." - 본문 中에서- 
먼지 묻은 추억을 이야기한 건, 이 책이 노인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자가 아~~~주 유명한, 스키너 박사다. 누구라도 이름만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그 인물.
스키너의 심리상자를 통해 조작적 조건화를 설명하고, 강화이론을 주창했던 인물. 그 자신의 딸을
실제 실험대상으로 삼아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딸들을 사랑했는지 다 아는
진정한 휴머니스트 그 스키너 박사다.
이 책 <스키너의 마지막 강의>는 심리학에 대한 그의 마지막 강의가 아니라,
노년의 삶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다.
그 자신이 실제 노년이 되어서 썼고,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년의 삶에 대한 고전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인생의 막바지까지 마지막 남은 청춘의 여운을 박박 긁어
마지막 소풍을 즐겁게 즐기는 방법을 담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법에 대한 행동지침서다.
친절하게도 이 책은 노인을 위한 배려가 돋보인다. 출판사에서 의도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책의 글자가 보통의 책보다 더 크다.
또한 자간(子間)이 넓다. 시력 감퇴가 시작되는 65세 이상의 노인들과
글이 겹쳐보이는 현상을 막기에 충분해 보인다. (※해서 나도 따라해 보았다^^ 폰트크기12pt에 자간 220%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지만, 노인을 위한 책과 블로그 포스팅은 있다. 
정리해보자.
나는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다만 늙음이 두렵다.
죽음은 인식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에 실상 죽으면 죽었다는 감각마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 늙음은 뚜렷한 증상을 보이며, 매일 같이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이건 인식의 세계이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누군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시력과 청력이 서서히 감퇴해 가는 것. 예전만큼 책을 읽을 수 없는 것.
두 발로 걸으며 여행을 할 수 없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것.
늙음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런 사실들이 두렵다.
스키너 박사의 이야기를 밑천 삼아,
이른 감이 있으나, 나도 이제 슬슬 노년의 인생 2막을 준비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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