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위량, 시대와 운명을 극복한 화가
판위량
장위량은 중국의 가난한 기생 출신으로 세계적인 화가가 된 여인이다. 여자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20세기 초, 장위량이 거둔 예술가로서의 성공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장위량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다. 장위량의 고향은 양저우로 그녀는 그곳에서 가난한 모자장수의 둘째로 태어났다. 이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그녀의 이름은 ‘천수칭’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첫 돌이 되기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동생과 어머니마저 연달아 세상을 떠나 장위량은 채 10살이 되기도 전 천애고아가 되었다. 다행히 외삼촌들이 그녀를 돌보아주었으나, 도박 빚이 있던 외삼촌 중 한 명이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우후현의 기방에 팔아버렸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찬 그녀는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이때 그녀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천수칭’이라는 이름 대신 ‘장위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판찬화
장위량의 연인이자 그녀를 미술의 세계로 인도한 판찬화는 1909년, 고향 안후이 성에 가까운 우후현에 세관 감독으로 부임했다. 신임 세관 감독으로 부임한 첫날, 상인들은 그를 위해 우후현에서 가장 이름난 기방 이춘원에서 취임 축하 연회를 열어주었다. 이는 전임 세관 감독들처럼 자신들의 부정과 탈세 행위 등을 눈감아 봐달라는 뇌물이었다. 여기에 더해 상인들은 판찬화가 고향에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부임한 것을 알고 그날 밤, 그의 집에 기생까지 보내주었다. 이날 판찬화가 만난 기생이 바로 장위량이었다.
상인들의 속셈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판찬화는 한밤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장위량을 보고 몹시 당황했다. 그는 좋은 말로 장위량을 타일러 기방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녀는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판찬화에게 매달렸다. 그날 밤, 장위량은 기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판찬화의 집에 머물며 그에게 우후현 상인들과 관리들의 오랜 관습에 대하여 상세히 말해주었다.
젊은시절 판위량
장위량의 이야기를 들은 판찬화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그는 이번 일을 악습 타파의 계기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판찬화는 신문사에 연락해 자신과 장위량의 혼인 소식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난 판찬화의 혼인 기사를 본 상인들은 깜짝 놀랐다. 판찬화는 이춘원에 장위량의 몸값을 지불하여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었다. 상인들은 장위량이 이춘원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어 온 상인들과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안절부절못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판찬화의 약점을 틀어쥘 생각에 희희낙락했던 상인들은 이제 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상인들을 상대로 신임 세관 감독 판찬화가 멋진 승리를 거둔 것이다.
우후현에서 임기를 마친 판찬화는 장위량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장위량은 조금이라도 판찬화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배운 것도, 기술도 없는 그녀가 판찬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이러한 장위량의 마음을 아는 판찬화는 그녀를 위해 가정교사를 붙여주었다. 공부를 시작한 장위량은 문학과 예술에 눈을 떴다. 어느 날 이웃집에 살고 있던 상하이 미술대학 교수 ‘홍예’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그녀는 그곳에서 그림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날 이후 장위량은 그림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판위량의 삶을 다룬 영화 '화혼'의 한 장면
장위량이 그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판찬화는 홍예에게 그녀의 그림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장위량에게 그림을 가르치면서 홍예는 그녀에게 남다른 감각이 있음을 알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볼 것을 추천하였다. 주위의 도움으로 장위량은 상하이 미술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녀는 판찬화 덕분에 학비나 생활비는 물론 돈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판찬화는 장위량을 자신의 정식 첩으로 맞았다. 그 후 장위량은 ‘판위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위량은 ‘판위량’이라는 이름을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였다. 그녀는 훗날 등단하여 정식으로 화가가 된 후에도 언제나 ‘판위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판위량 作 '자화상'
장위량이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향에 있던 조강지처가 판찬화에게 위량을 만나고 싶다고 요구했다. 고향에서 올라온 본처는 판찬화와 장위량의 집에 머물렀고 세 사람은 한동안 함께 살았다. 같이 사는 동안 누구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 무렵 장위량은 판찬화에게 유럽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서양화를 보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판찬화는 무거운 마음으로 장위량의 유학을 찬성했다. 장위량은 판찬화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국비 유학생 시험을 치렀고 프랑스 리옹 국립 미술전문대학에 합격했다.
서양 미술의 본고장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닦은 장위량은 1925년, 프랑스 국립 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위량은 로마 국립 미술학원에 입학해 회화는 물론 조각까지 공부했다. 1927년, 위량은 이탈리아 국제 미술 전람회에 출품한 습작 유화 <나녀>로 중국인 최초로 3등에 당선되었다. 마침내 학생이 아닌 정식 서양화가가 되어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28년, 위량은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한 그해, 장위량은 첫 개인전을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이듬해 그녀는 자신의 모교인 상하이 미술 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당시만 해도 서양화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작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장위량을 찾는 곳은 많았다. 그녀는 후학 지도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이어나갔다. 1929년 개최된 제1회 전국 미전에 참가한 장위량은 중국 서양화가 중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판위량 作 '나녀'
1936년 장위량은 난징에서 총 네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하지만 명성이 높아질수록 비난도 거세졌다. 그 비난은 그림이나 작품이 아니라 기생이었던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 장위량을 향한 날선 인신공격은 가족에게까지 이어졌다. 결국 그녀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계속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중국을 다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7년, 장위량은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으로 떠났다.
장위량은 유럽으로 떠난 후에도 가족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소박한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판찬화는 아픈 몸으로 직접 편지를 써서 그녀의 귀국을 만류했다. 유학파 서양화가인 장위량이 귀국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각상을 만들고 있는 판위량
1959년, 장위량의 작품 <짱다첸 두상>이 파리 현대미술박물관에 입성했다. 소식을 들은 장위량은 가장 먼저 판찬화에게 연락했지만 1년이 넘도록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 장위량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판찬화가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세가 깊었던 판찬화가 혹시라도 장위량이 귀국할 것을 염려하여 며느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었다. 판찬화가 세상을 떠난 뒤 장위량은 삶의 의욕을 잃고 건강이 크게 약해져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고, 몇 년 후 프랑스 파리에서 20여 년간의 오랜 객지 생활 끝에 홀로 생을 마감했다.
판위량 作 '가족'
장위량과 판찬화의 첫 만남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부부가 된 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장위량은 끝내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장위량의 영혼이 담긴 작품들은 판찬화의 유언에 따라 그의 고향인 안후이성으로 돌아왔다. 장위량이 만약 이를 알았다면 판찬화의 손을 꼭 잡은 채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