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 후기/리뷰
이번 19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인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이 극장개봉을 먼저했다. 보통은 영화제 출품작들을 먼저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않은데 이런점에서 '무비꼴라쥬'가 고맙게 느껴진다. 대학로에 공연을 보러간김에 영화 한편 보려고 선택했던건데 의외의 공감 포인트도 많았고, 모리 역의 (카세 료)의 연기가 너무 인상깊어서 역시 홍상수! 라는 말이 또 나오게 만든 작품이었다. 실제로 충무로에 많은 스타감독들이 있다. 흥행이 대박나서 인정받은 감독도 있고, 작품성 때문에 영화팬들에게 인정받는 감독도 존재한다. 홍상수 감독 역시 그런 감독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가 영화를 만든다면 무언가를 보여줄거야.' 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영화를 보는 사람도 적지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동안은 우리를 크게 실망시킨적이 없는 홍상수 감독이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볼것은 시간이다. 그렇다고 시간여행이 등장하거나 미지의 초능력을 사용하는 인물이 나오는것도 아니다. 말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그리고 감독이 전하고 싶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 그것이 영화의 전반에 깔려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 의외로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
권(서영하)이라는 여성은 병때문에 일상을 포기하고 치료를 받기위해 떠났다. 그로부터 한참 후 떠나기전 일하던 어학원을 찾은 그녀는 두툼한 편지뭉치를 하나 받게된다. 편지를 읽어나가던 그녀는 자리를 옮기려 계단을 내려오던 중 갑작스런 현기증에 주저앉고, 편지는 바닥에 흩어져 버린다. 편지들을 하나하나 줏어모은 후 그제서야 편지에 날짜가 없음을 알게된 권. 평소 자주가던 카페에서 순서를 알 수 없어진 편지를 그대로 읽어나가는 권. 편지에 쓰여진 장면장면들이 우리가 보게될 영화 속 이야기이다.
'모리'(카세 료)라는 일본인은 한 여성을 찾기위해 한국에 왔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단 한사람. 하지만 연락도 안되고 그녀는 집에도 없다. 집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며 그녀를 기다리는 모리. 한손에는 언제나 책한권을 들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는 장면장면이 모두 퍼즐처럼 흩어져있다. 권이 읽는 편지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기에 시간의 정렬이 어긋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긋나있는 퍼즐들이 하나둘 맞춰지는걸 보는 관객 입장에선 더욱 몰입도가 높아지고 일상에서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 까지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다.
모리가 주로 하는일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자고,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기다리는 그녀의 집근처에서 식사를 하며 그녀가 왔는지 확인을 하는것이다. 물론 그런 일상만 반복된다면 무슨 재미로 영화를 볼까? 모리라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주변인물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간혹 느낀점을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너무 포장하지 않고 보여줘서 마치 내가 무언가 들켜버린것 같은 느낌이랄까? 너무 익숙하고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는데도 진행기법의 독특함때문에 새롭게 다가온다.
절대 잊지못해 존경하기까지 하는 여자를 기다리면서도 술김에 자주가던 카페의 여주인과 하룻밤을 보낸 모리의 모순점. 좋아한다고는 말하지만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는...(사랑하고 싶다고 둘러대는) 한 남자의 회피. 하지만 여자에게 상처주고 싶진 않은 모순의 배려심. 이 모든것을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 전해준다. 그래서 더 욱 인간적이고 모리라는 인물에게 빠져들게된다.
모리가 항상 들고다니던 책의 제목은 '시간'이다. 시간에 관한 책이고, 얇아 보이는 책인데도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걸 보면 그 책의 내용은 모리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것같다. 시간은 물건이나 사람처럼 실체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놓은것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관념을 항상 생각하며 행동하는 모리. 그의 대사속에서도 계속해서 그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이 숨어있다.
굳이 사람이 과거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더 나아지려 할 필요가 있는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데 어째서 미래를 생각해야 하며, 한번 사는 인생인데 무엇때문에 주변을 의식하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가에 대한 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어찌보면 허무주의 인가? 그저 한번뿐인 인생을 즐겨라! 라고 말하고 싶은걸까... 하지만 전혀 공감되지 않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장면들이 끊어져서 진행되는 독특함은 좋았지만 결말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모리가 자신의 모든 치부까지 드러낸 편지를 읽고난 후의 권. 그의 솔직함에 대해 인정한것일까? 한국에서의 이러저러한 일들은 그저 기억속에 묻어둔채 현재를 살아가는 둘의 모습이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문제였던 거구나...
소위 지식인처럼 행동하던 이가 나이를 논하며 아무에게나 삿대질하는 장면이나, 다소 민망할정도로 처음만난 외국인의 신상을 캐묻는 한국사람들의 무례한 행동.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이 넘치는 한국의 멋. 많은 것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퍼즐을 완성해 나갔던 영화였다. '기.승.전.결' 없어보이지만 순서만 바뀌었을뿐 있을건 다있는 영화. 몇가지 장면은 편지를 분실해서였는지 빠져있어서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그렇다고해서 편지속의 과거와 현재가 공유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런 영화였다. 시간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철학적인 주제를 어렵게 풀어나가지 않고 일상속에 잘 녹여준 소중한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자유의 언덕] 후기를 마침.
PS. 솔직히 이 영화가 청불을 받을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애매하긴 하다. 과도한 노출은 커녕 노출이 아예 없다고 보면된다. 그럼에도 청불판정을 받은 이유는 뭘까? 청소년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소재라서 그랬을까. 하긴, 나도 아직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보긴 어려울것 같다. 그냥 무언가 느꼈다면 그걸로 족하다.
- 북촌 사람들은 다 영어를 잘하나?
- 엔딩 크래딧에 개이름까지 올라올줄이야!
- 한국영화인데 영어가 더 많이나옴
- 나의 시간은 제대로 흐르고 있을까
- 나역시 모순덩어리, 인간은 다 그런건가
| 자유의 언덕 - 감독
- 홍상수
- 출연
- 카세 료, 문소리, 서영화
- 개봉
- 2014 대한민국
-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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