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초반에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이나 데이빗 린치의 '사구'와 같은 작품이 생각났고 80년대에 많이 선보였던 작품성 있는 영화로 불렀던 예술영화들이 생각났다. 최근 영화들은 딱히 예술영화와 대중영화의 이중잣대가 애매한 상황이다. 그보다는 자본이 많이 들어간 작품과 자본이 적게 들어간 영화로 나눠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상물의 발달과 더불어 더이상 영상으로 통한 의미전달을 하지 않고 영화 내부에 수많은 은유를 통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은 없다.
철학적인 논제를 끌어들이는 작품들도 이제는 예전처럼 '우리가 찍은 영화는 예술영화니 차분하게 앉아서 진득하니 보세요!'라는 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원씬 원컷이라 하여 길게 한 씬이 넘어가는 작품도 드물다. 현대인에게는 광고와도 같이 빠르고 현란하게 쇼트를 나누는 삶에 익숙해져 있어 느린 화면이나 전개는 참지 못한다. 어느덧 빠른 전개에 익숙해져서 최근 영화들은 대부분 과거와는 호흡이 다르다. 아님, 최근에 내가 본 영화들이 다 그렇거나.
그런 와중에 보게 된 '더블'은 무척이나 별난 영화다. 현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 할 수 있고 이상한 별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영화속 배경도 알 수 없고 시간도 알 수 없고 시대도 알 수 없다. '더블'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주인공인 제시 아이젠버그는 버스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자신의 자리니 비키라고 한다. 버스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주변을 돌아본 주인공은 주저주저하다 말 없이 일어난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들어나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리려 하는데 짐을 옮기게 되어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자신의 가방을 놓고 내린다.
초반에 알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무척이나 우유부단하다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가는데 출입증이 말썽이다. 7년이나 회사를 다녔지만 경비원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대한다. 하루 통행증을 끊어 들어간다. 어떤 회사인지 몰라도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사무직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원들이 주인공을 제외하면 노인들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원들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자체가 노인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어 보인다.
회사는 대령이라는 자가 다스리고 있는데 그는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 보인다. 영화 속 배경은 전부 시대를 알 수 없지만 빠르면 70년대일듯하고 느낌은 60년대가 아닐까 한다. 사회 자체가 무미건조하다. 다들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고 기계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도 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한다.
주인공의 취미는 도찰이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정신을 갖고 있는 미아 와사코브스카를 좋아한다. 건너편 집에 살고 있는 미아를 망안경으로 관찰하며 그가 하는 행동을 훔쳐본다. 어느날 망안경으로 바라보는 자신을 본 어느 남자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자살한다. 경찰은 이런 자살이 흔하다고 한다. 주인공은 자살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여기는데 대부분 젊은이들인 죽는 듯 하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사회에서 젊은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보였다.
갑자기 신입사원이 왔는데 주인공과 똑같이 생겼다. 주인공은 소심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고 자신의 의견은 없다시피한 삶을 살았다면 자신과 똑같은 존재는 자신의 완전히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평소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을 척척 해낸다. 그것도 뻔뻔하게. 자기와 똑같이 생긴 존재에 놀라지만 그가 어느덧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만 무시한다. 오히려 좋아한다.
지금까지 아무런 존재감없이 살았던 주인공은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명력을 느낀다. 누군가의 꼭두가시로 살아가기도 싫고 자신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자신과 똑같은 존재는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함께 경험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 주인공은 자살을 택한다. 유일한 선택인지는 모르겠고 남들과 다른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선택한 결과물이다.
영화는 무척이나 이질적이다. 지금까지 영화를 주로 흥행영화를 보고 블럭버스터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 수 있다. 영화의 호흡이 느린 것은 아니지만 리듬 자체가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도 특이하게도 일본 노래가 나온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막이 나올 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가요다. 나조차도 제목을 알 수 없는데 70년대 통기타 노래처럼 들리는데 여자의 목소리다. 아주 아주 색다른 경험이다. 외국 영화를 보는데 마지막에 가요가 나오는데 나조차도 모르는 노래라니!!!
주인공인 제시 아이젠버그는 연기가 훌륭하다. 예전 소셜네트워크에서도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영화에서 연기는 무가치한 존재처럼 보이는 인물을 훌륭히 연기한다. 영화는 실제로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과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기력이라는 두가지 축으로 지탱되며 흘러간다. 영화의 원작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이라고 하는데 아주 현대적으로 연출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의도적으로 거꾸로 연출한 듯 하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좀 어색하고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을 듯 하지만 블럭버스터적인 때려부수고 말랑 말랑한 영화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색다른 영상과 줄거리와 세계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폴란드 감독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나 러시아 감독들처럼 정말로 전개가 느리고 장면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니 그 정도의 걱정없이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