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여행 매거진 리스트 - 여성포털이지데이

엄마와 교대하고 병원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스윽 얼굴에 닿았다. 아직은 겨울의 깃이 채 물러가지 않는 2월의 중간 즈음이었다. 몸서리를 치며 외투를 단단히 잠그고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으로 향했다. 국립재활원에서 집으로 가려면 수유역에서 버스를 타고 가거나 전철을 타고 창동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한다.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가서 좋기는 한데 차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30분 이상 기다릴 때도 있어 오늘도 가볍게 포기하고 전철을 타러 갔다. 수유역에서 창동역까지는 두 정거장. 퇴근 시간을 넘긴 전철은 좌석은 없지만 비교적 한적하다. 창동역 플랫폼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전동차가 진입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니 딱 한 자리 남아 염치 불구하고 비집고 앉는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몇 자 읽지도 않았는데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과 함께 “이 열차는 소요산, 소요산행 열차입니다. 북쪽으로 가장 멀리 가는 열차입니다.” 하는 차장의 뜻하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북쪽으로 가장 멀리 가는 1호선 소요산행 전동차.

그리고 이젠 북쪽으로 가는 유일한 기차가 되어버린 경원선 통근열차가 문득 떠올랐다. 문산으로 가는 경의선도, 춘천으로 가는 경춘선도 모두 지하철로 바뀌어버린 시점에서 통근 열차로 남은 것은 신탄리행 꽃그림 기차 하나뿐 이련가. 이마저도 세월에 밀려 사라져버리면 북쪽행 기차는 아주 사라지게 될 터였다.

병원을 오가는 시간에 어느새 매서운 겨울의 기세는 한 풀 꺾어졌고, 얼마 전 다녀온 부산 여행의 여운도 조금 가벼워진 때에 다시 운동화 끈을 매고 경원선 기차를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신탄리로 가는 통근열차는 동두천역에서 탈 수 있다. 매시 50분에 출발하는 열차로 그 덕에 시간은 헷갈릴 것도 없고, 신탄리에서 동두천으로는 매시 정각에 있으니 더더군다나 잊을 것도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곧장 신탄리로 가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신망리역에 먼저 들리기로 했다. 오늘의 동행은 예전 사진카페 친구인 ‘소피아’ 지혜이다. 기상청에 근무하는 친구인데 교대근무라 마침 평일에 쉬게 되었고, 어디 가볍게 사진 찍으러 가자고 전화했다 이 먼 동네까지 오게 된 친구였다.

점심 시간에 맞춰 동두천역에 도착해 신망리행 기차표를 사려고 하니 신망리표는 없다고 신탄리역으로 사라고 하신다. 동두천역에서 신탄리까지는 1,000원. 거리요금으로 계산되는 전철표보다 싸다. 예전 이 열차는 의정부로 가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전철이 없을 때 오로지 버스와 기차가 서울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아침에는 연일행사처럼 도로가 밀려 정체없이 갈 수 있는 기차가 애용되었던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350원하던 비둘기열차를 탔었는데 어느 순간 신식 기차로 바뀌더니 그나마도 알록달록 꽃이 그려진 기차로 바뀌어 일명 ‘꽃마차’로 불리었었다. 그랬던 것이 2005년 동두천에 전철이 들어오며 구간이 짧아져버렸다. 예전에 동두천역으로 불리던 역사가 동두천중앙역이 되고, 동안역이라 불리던 곳이 동두천역으로 변경되며 기차는 의정부가 아닌 동두천역에서 신탄리역까지 운행되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히 북쪽으로 가는 것보다 수도인 서울로 가는 일이 잦아진 나로서는 이 기차를 이용하는 횟수는 지극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타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2009년 말 여행파트너 뽁언니와 3박 4일간 여행을 가려고 철원에서 만나기로 하여 탔었으니까 무려 2년만이다. 기차 내부는 기억속의 이미지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본래의 색을 알 수 없는 떼가 진 커튼, 뿌옇게 흐려진 창, 빛이 바랜 어두운 적색의 의자, 그리고 객차 내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천장의 선풍기까지. 단번에 시간이 90년대 즈음으로 뒷걸음질 친 기분이다. 그 안에는 점잖게 한복을 빼입은 할아버지와 살짝 고개를 숙이고 피로를 달래는 아주머니, 작은 모자를 눌러쓰고 굳게 입을 다문 아저씨와 소란스러운 두 아가씨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승객이 있었다.

동두천역에서 신탄리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47분. 예전에 신탄리역에서 동두천역(지금의 동두천중앙역)까지 걸리는 시간이 딱 1시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 빨라지지도 않은 속도이다. 출발한 열차는 채 속도도 내기 전에 북쪽으로 가장 멀리 간다는 1호선의 최북역 소요산역에 정차했다. 주말에는 등산객들과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이 작은 역은 평일의 한산함을 보이고 있다.

낮고 노쇠한 건물들을 지나친 기차는 초성리역을 지나고 한탄강을 건너자 본격적으로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아직은 모내기철이 되지 않은 심심한 논과 수묵화처럼 검은 둥근 산, 그리고 간간이 드러나는 민가와 얼음이 풀리지 않은 냇가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조금은 밋밋할 것 같은 경치들.

전곡, 연천역을 차례로 통과하고 마침내 기차가 신망리역에 정차했다.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가 우연히 창밖을 보다 친구인 소피아가 먼저 알아차리고 재촉해서 내린 걸음이었다. 외선 철로와 두 걸음이면 다 걸을 것 같은 플랫폼, 어울리지 않게 밝은 청록색 의자가 전부인 참 작은 역이었다. 그나마 무인역인 줄 알고 친구와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얼결에 고개를 돌리니 아주머니 한 분이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얼른 기차표를 내란다. 역무원은 없고, 대신 표를 받으시는 중인가보다. 잠시 들렀다가 다음 열차로 신탄리에 갈 거라고 말씀드리니 퉁명스레 그럼 진작 말하지 괜히 기다렸다며 스윽 사무실로 사라지신다. 계신지도 몰랐다고 대답하면 더욱 민망할 뻔한 상황이었다.

신망리역은 무인기차역으로 변경되고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졌다. 그래서 예전에 대합실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들어서면 한쪽 면을 꽉 채운 서가와 예쁜 체크무늬 커다란 책상, 집의 식탁 의자로 쓰이는 것 같은 나무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 책장 옆, 창문 아래에는 공중전화 대신 쓰이는 카드리더폰이 두 개 달려 있는데 이런 전화는 처음 보는 거라 조금 신기하다.

표를 받거나 팔던 곳엔 신망리역 근처에서 찍은 사계의 사진이 녹색 칠판에 장식되어 있고, 도서관으로 화한 신망리를 취재했던 신문 기사도 스크랩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가는 것은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오래된 서적들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보았을 법한 세로로 쓰인 책이나 조금 촌스러운 티가 나는 삽화가 그러진 동화 등을 팔랑이며 보며 은근슬쩍 지어지는 미소는 어쩔 수가 없다. 특히 어렸을 적 부모님이 독서의 취미를 붙이겠다며 사주셨던 위인전이나 청소년문학전집, 그리고 계몽사의 여러 시리즈물을 보며 추억을 곱씹자니 그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랬다. 이곳에 있는 책들은 이제는 거의 시중에서는 보이지 않을 7,8,90년대 출판한 책들이 꽂혀져 있는 것이었다. 마치 흘러가는 시간을 애써 잡아두려는 듯 말이다.

작은 도서관을 배회하고 나서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신망리역에서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신망리역에 가겠다 생각하고 인터넷에서 식당을 찾을 때 유일하게 나온 곳은 신망리 원조의 유일 순대국이라는 식당이었다. 순대국집은 2차선 도로를 건너 바로 눈에 뜨였다. 도로 쪽에는 후문이 있고, 정문은 반대편이었는데 무조건 도로에서 간판을 보고 들어가자 그쪽이 후문이라며 나중에 주인 아주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다.

허름한 식당의 황토색 벽에는 온통 낙서로 장식되어 있었다. 군부대가 많은 이곳엔 역시나 군인 손님들이 많은지 벽에는 무슨무슨 부대며 군인의 관등성명등이 적혀 있기도 했고 더러는 맛집인 유일순대국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나 인근 산에 등산 온 등산객들의 짧은 글귀도 눈에 뜨였다. 그 사이 주문한 순대국이 놓였다.

보통의 부연 국과 달리 붉게 물든 국물은 얼큰함이 단번에 보였고, 사진을 찍고 얼른 한 술 뜨자 뜨거운 기운이 훅 먼저 와 닿았다. 간을 한답시고 절인 고추를 탈탈 넣어 놓고 술술 저어 몇 숟가락 먹지도 않아 입이 확확 아리기 시작했다. 본래 메운 것도 잘 먹지 못하는 주제에 그 독한 고추를 겁 없이 넣었으니 오죽하랴. 물을 반찬 삼아 마시며 그래도 기어이 밥을 모두 떠먹고 나자 그렇게 배가 든든할 수 없었다. 물론 속은 좀 쓰렸지만.

계산을 끝내고 나와 식당 정면 사진을 찍으려는데 짓궂은 아저씨 한 분이 잘 나오게 찍으라며, 찍고 나서 사진을 보내라며 농을 던진다. 피식 웃음을 물고 얼른 한 장 찍고 인사를 건네고는 기차 시간에 맞추어 다시 신망리역으로 향했다.

신망리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피난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미군 제7사단이 부지위에 가옥을 지어 피난민을 입주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마을에 사람이 들이며 미군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라며 신망리(New Hope Town)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실향민일지언정 미래를 꿈꾸는 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부풀었던 사람들이 사는 곳 신망리의 역사는 이제는 역무원조차 없는 작은 역이지만 그 작은 도서관의 따스함만큼 포근한 인심이 깃들어 있음을 나는 잊지 않는다.

+ 경원선 정보

- 운행구간 : 동두천 - 신탄리 약 50분

- 운행간격 : 동두천 매 50분, 신탄리 매 정각

- 표 : 동두천 - 신탄리 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