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여행 매거진 리스트 - 여성포털이지데이

호텔 조식으로 배를 채우고 체크아웃 후 가방을 프런트에 맡겼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파카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리문을 밀로 나와 우중충하게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다 지하보도로 내려갔다. 목적상으로는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쇼후쿠지로 잡았지만 어찌 될 지 그저 멍하게 걷는 와중이었다. 기온역에서 올라오니 가까이에 도초지라는 사찰이 있어 먼저 들렀다. 806년 당 유학 갔던 일본 승려 구카이가 창건한 절이라는 안내문이 한글로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롯카이도 내부에 천수관음입상이 국가 중요문화재라고 하여 잠시 들러보고 뜰에 세워진 높고 커다란 붉은 탑만 올려다 보다 슬쩍 나섰다. 쇼후쿠지는 도초지에서 한 블록 더 걸어가 좁은 골목을 통과해서 바로 보였다.

앞뜰에는 작은 연못과 전각이 세워져 있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는데 막상 경내의 입장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스님들의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일본 최초의 사찰을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워 기웃거리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쇼후쿠지에서 나와 도초지쪽으로 다시 걸어가 기온역에서 길을 건너 구시다 신사로 향했다. 그 사이 비가 그쳐 파카 모자는 벗고 간만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걷는 걸음이었다. 신사 주변에서 길을 헤매 나카가와의 지류에 해당하는 개천을 다시 건너 신사의 후문 즈음 되어 보이는 곳에 당도했다. 마치 술통 같이 커다란 등이 줄줄이 달려 있는 일본 신사 특유의 입구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가마가 서 있다. 구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최대의 마츠리인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의 출발점으로 축제 때 쓰이는 가마를 이곳에 이렇게 보관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마에는 갖갖이 인형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 인형들은 일본의 신들이라고 한다. 가마를 지나쳐 문 하나를 건너 들어가면 본당이 나온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와 바다의 신 스사노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그 앞에는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오미쿠지가 마련되어 있다. 궁금해서 30엔을 넣고 한국어로 된 오미쿠지를 뽑아 펼쳐드니 좋은 내용이 가득가득 적혀져 있다. 운세는 대길이다. 성미만 급하게 굴지 않으면 괜찮단다.

소망은 느긋하게 기다리면 이루어질 것이고 기다리는 사람은 늦어도 올 거란다. 여행에는 지장이 없고 사람 구하는 것에도 좋으며 상업에도 이익이 있단다. 두루두루 둘러보면 다 좋은데 급한 마음만 먹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소리 같다. 고이고이 접어 주머니에 쏘옥 넣었다. 본당에서 슬쩍 옆으로 틀어 뒤뜰로 향하니 소원팻말인 에마가 줄줄이 매달아 있다. 간간이 한국어로 쓰인 것도 보인다.

살짝 더 걸어 들어가니 오줌 놓고 있는 아이가 있고, 우거지 나무 아래 조용한 건물 하나와 붉은 도리이가 세워진 신사 하나가 눈에 뜨였다. 도리이 아래를 통과해 신사를 잠시 살피고 다시 본당을 지나 아주 작은 연못 속 비단잉어가 노니는 것을 바라보다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단풍이 연못가에 내려앉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벌써 12월 초건만 한국보다 비교적 남쪽의 후쿠오카는 아직 채 단풍이 저물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에선 볼 수 없을 단풍을 이렇게 감상할 수 있는 기분, 참 특별하지 않던가.

본당을 지나쳐 뜰을 빠져나와 구시다 신사 정문을 나섰다. 후쿠오카 타워를 가기 위해서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가야하나 지도를 보며 걷는데 노란 은행나무의 잎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나무로 세워진 사찰 담 옆으로 하얀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때마침 뛰어간다. 정말이지, 떠나간 가을이 참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다녀오고 나서 포스팅 하기 위해 구시다 신사에 대한 정보를 찾는데 그곳에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칼 ‘히젠토’가 보관된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전 정보가 없어 놓친 것 중에서도 나중에 와 가장 아쉬웠던 일이었다. 비록 유로 관람이긴 했으나 한 나라의 국모를 무참히 죽였던 칼이니만큼 두 동강이 나도록 노려보고 왔어야 했는데 어쩜 이렇게 한탄스러운 일이 있을까. 그 사실을 알고 나선 아름답다고 여겼던 구시다 신사가 어쩐지 조금 섬뜩했던 것도 같다는 묘한 여운이 남았다. 사람이란 어찌 이다지도 간사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