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타역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복잡한 역을 구불구불 지나 유후인으로 가는 플랫폼에 서니 유후인노모리가 들어서고 있었다. 청록색의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는 예쁜 기차지만 외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애니메이션 제목에나 쓰일 것 같은 깜찍한 유후인노모리 로고였다. 당장에라도 리본처럼 풀려 날아갈 것만 같은 글자체와 몽글몽글 구름을 닮은 듯한 테두리가 어찌나 귀여운지. 그래서 유후인모노리에 대한 감상은 순식간에 우아함에서 귀여움으로 돌변해 버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카키색 두 쌍의 의자가 양 쪽으로 나열해 있고 조금 비좁다 싶을 정도로 복도가 놓여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예스럽다. 아주 먼 과거 말고 한 80년대 즈음 되어 보이는 그런 맛이라고 할까. 주황색의 은은한 조명 때문일 수도 있겠고, 금을 씌운 선반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무엇보다 역시 카키색을 씌워놓은 의자가 더없이 지난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기차표에 적힌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앞으로 걸어가니 운 좋게도 맨 앞에 좌석이다. 커다란 창은 밖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아 보이고, 의자에서 쓰윽 나오는 테이블 덕에 음료나 군것질거리를 풀어놓기에도 편리해 보인다. 의자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승객이 모두 탑승했는지 출발하는 기차는 복잡한 오이타를 빠져나가 한적한 평야와 산을 가로질렀다. 특급열차의 특성대로 지역의 작은 정거장은 서지 않는 기차는 몇 개의 보통 열차를 지나치고 그때마다 하릴 없이 손을 흔든다. 그 사이 승무원이 와서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고, 군것질 거리를 사라 하기도 하는 등 아소에 갈 때처럼 이벤트가 여럿 있었지만 묵묵히 밖의 풍경에 눈이 쏠려 있던 내겐 별세계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차가 유후인역에 도착했다.
인기 있는 관광지답게 깔끔한 유후인역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체육관을 설계한 이소자키 아리타라는 건축가가 중세 유럽예배당을 모델로 하여 지은 수작이라 한다. 개찰구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고, 대합실 내에 미술전시관이 함께 있어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술감상도 할 수 있는 이점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보단 플랫폼에 족탕이 마련되어 있는 독특한 곳이다. 유후인 관광의 출발지이니만큼 모든 교통수단이 집약되어 있는데, 유후인에서 내가 머물게될 숙소 마키바노 이에로 가려면 버스보다는 택시가 좀 더 유용했다. 걸어서도 15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일단 초행길이니만큼 주저 없이 택시를 탔다. 역에서 마키바도 이에까지는 택시로 약 3분 거리. 커다란 석조 도리이를 지나 죠우다리 건너 관광종합사무소와 멀지 않은 곳에 택시가 멈추어서며 여기가 마키바노 이에라고 하신다.
돈을 지불하고 내려서니 독특한 지붕을 얹은 집이 눈에 뜨이고, 납작하고 커다란 바위에 정갈한 일본어로 ‘牧場の家’ 목장의 집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가 바로 유후인에서 내가 머물게 될 료칸이고, 규슈 여행에선 두 번째 묵는 료칸이다. 우레시노에서 묵었던 와라쿠엔이 현대식 리조트로 되어 있다면 마키바노 이에는 일본식 가옥으로 지어진 료칸이라는 것에서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다. 회색 자갈이 깔린 까칠한 마당을 걸어가 정면의 본채로 들어섰다. 잘 생긴 청년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묻기에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온 숙박권을 내미는데 뒤쪽에서 한국어로 아저씨 한분이 말을 거신다. 혼자 온 여행객이냐, 몇 박 하느냐 등등을 물어오기에 대답했더니 일본어로 다시 알려주시는 아저씨 덕분에 체크인이 수월하게 끝이 났다.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유후다케라는 별채. 마키바노 이에는 모든 객실이 이렇게 독채로 되어 있어 진짜 가정집에서 묵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한다. 실내는 기존에 머물렀던 곳들과 마찬가지로 거실과 방, 그리고 테라스로 나뉘어져 있다. 거실에는 네모난 고타쓰와 TV가 놓여 있고 테라스에는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다. 바닥엔 습기를 머금은 대나무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다다미이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마키바노 이에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가옥 뒤쪽에 삐죽이 솟은 유후다케가 보였다. 일본 백경 중 하나라는 산으로 저 산을 보면서 즐기는 노천욕이 그렇게 좋다고 하며 마키바노 이에의 노천탕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내심 기대가 컸다.
마키바노 이에도 여느 료칸처럼 조식과 석식을 모두 제공했다.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가면 객실 이름이 적힌 팻말이 식탁에 세워져 있고 직원이 그쪽으로 안내해 주면 잘 차려진 상차림이 맞이한다. 기본적인 국과 생선회에서부터 일본 음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깔끔함까지 곁들여진 정식을 가이세키요리라고 일컫는데 에도시대부터 연회에 이용하던 상차림이라고 한다. 일본의 정식 요리인 혼젠요리를 간단하게 변형시킨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코스형식으로 음식이 나오며 국을 뜻하는 즙과 반찬을 이르는 채를 합쳐 1즙3채, 1즙5채, 2즙5채 등으로 나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과 생선회를 비롯한 모든 반찬들은 계절과 손님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음식 마다 같은 재료, 요리법, 맛이 중복되지 않도록 구성되고 그 그릇까지 신경을 쓰는 가히 최고의 대접 상차림이다. 그만큼 료칸에서 제공하는 가시세키요리가 아니고서는 비싼 가격을 치루고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하긴 한정식도 비싸긴 매한가지이긴 하다.
식사를 하고 나서 잠시 숨을 돌리고 목욕용품을 챙겨 온천을 하러 간다. 낮에 가면 유후다케를 볼 수 있지만 밤의 서늘한 낭만을 즐기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조금 추워서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장점이고. 가볍게 몸을 씻고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도 금세 풀리는 것 같다. 널찍한 온천에 혼자 앉아 퐁당거리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잠수도 좀 하고 물장구도 치고 뿌옇게 올라가는 연기를 멍하게 쳐다보기도 하며 여유를 즐긴다. 혼자 즐기는 온천욕 가운데 은근슬쩍 가족 생각이 좀 났다. 유난히 규슈 여행을 하며 가족이 떠오르는 적이 많았다. 워낙 가족이 즐기기에 좋은 곳이 많고, 온천도 많다 보니 부모님을 모시고 왔으면 참 좋겠구나 싶은 생각에서였다. 지나고 난 후에 생각해보면 그렇게 자꾸 가족이 생각이 났던 건 여행 후에 다가왔던 큰 사건에 대한 예감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간 규슈는 유난히 가족 생각나게 만드는 곳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 주소 : 大分県大分郡湯布院町川上2870
+ 전화번호 : 0977-84-2138
+ 체크인아웃 : 15:00 / 10:00
+ 식사 : 조식, 석식 제공
+ 객실수 : 12개 독채
+ 픽업 : 불가능
+ 찾아가기 : 유후인역에서 나오셔서 100m 직진 후, 큰 석조도리이가 보이는 방면으로 가세요.
석조도리이를 지나 다시 200m 쯤 가시면 강 하나 지나게 되고 다리를 지나면 호와은행이라고 은행 건물 건너편에 보이실 거에요.
그 맞은편이 유후인종합관광안내소이고, 안내소 지나 식당건물 지나자 마자 바로 있는게 마키바노이에입니다.
+ 약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