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아직은 춘래 불사춘(春來不似春)이긴 하지만,

어딘가로 가야만 하는, 어쨌건 봄이다.

 

주왕산(周王山/722m)!

태백산맥이 그 영묘한 지맥을 베푼 자리에

경북 청송군과 영덕군이 은혜로운 양품으로 안고

태행산<933m>과 대둔산<905m>으로 북풍 한설을 막아서 만든 산.

1976년 우리나라의 열 두 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다.

 

아직은 무늬만 봄색깔인 3월 초순의 봄맞이는

주왕산을 배알하는 것으로 가늠한다.

 

 

여기...

 주왕산의 출발점은 대전사(신라 문무왕 12년-762년 창건) 입구이다.

주왕(周王)의 아들 대전도군의 아들이름에서 절명을 따 왔다는...

 

이곳...

주왕산은 주왕의 전설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중국 당나라 시절, 진나라의 후손인 주도가 왕권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후주천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를하고 머나먼 이곳

신라땅으로 그의 패잔병들과 함께 피신했다가 당의 사주를 받은

신라장수 마장군 형제에게 살해당했다는 전설에서 유래...

 

혹은...

신라 태종 무열 왕의 직계후손인 명주군왕 김주원(혹은,

 신라말, 난을 일으켰던 김헌창<김주원의 아들>을 지칭하기도 한다.)이

이곳 주왕산에 은거하여 수도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그런데...

당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꽤 많은 부하들과 가족들을 대동하고

당시로는 너무나 먼 이곳까지 피신을 했다는 것과

당나라의 황제가 신라의 왕에게 협조를 청하여 반란군을 제압하게되는

국제적인 큰 일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나 우리 역사의 어느페이지에도 그 기록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래서...

조선조에 들어서 당시 무조건적인 대륙 지향정서에 편승한 모화(慕華)사상이

사대주의로 포장되어

살기좋고 풍경 좋은 여기 주왕산을 중국 왕족의 연고지로 변모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필자의 의견...

 

 

쫓기는 주왕과 뒤쫓는 신라 마장군이 격전을 치를 때

마장군의 대장기를 꽂았다는 기암(旗岩)

주왕산 산행의 초입에 위치한다.

 

오늘의 산행은...

대전사 주차장-주왕산 정상-후리메기 삼거리-제3폭포-제2폭포

-제1폭포-학소대-급수대-망월대-대전사...

로 원점 회귀하는 비교적 쉬운 코스로 결정.

 

 

동남 사면의 주왕봉 코스는 초입부에서부터 오름을 계속 만나야 한다.

산행 전반부에, 체력이 비교적 온전할 때 거친 오름을 타고 후반부에 느긋하게

내림길을 선택하는 저체력 소지자의 전형적인 잔머리 산행법~!

 

항상 오르막 길은 수많은 후회와 자책이 같이 가는 길이다.

평소에 다져놓지 못한 체력부실의 후회막심,

그리고 산행때에는 정말 불필요한 일부 살들에 대한 자책~!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같이 올라가야 한다.

관리부재에 대한 벌이다.

 

 

활엽수가 있는 길은 가을에 참 좋겠다.

군데 군데 군락을 이룬 침엽수림은 겨울에 좋겠고,

오밀 조밀 산길도 정리가 잘되어 있다.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새 물이 오르고 있다.

봄이 따라서 오르고 있다.

지난 엄동을 그렇게 겪고도 여전히 옴팡지게 살아있다.

그래, 내가 니네들 때문에 산에 온단다,

해마다 살아 있는 너희들이 많이 고맙다.

 

 

여기에는...

절경, 비경...쓸 말이 없다.

태산 같은 애물단지로 메고 온 DSLR 카메라도 별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싸락눈이 휘날리는 이런 날씨에는

내 눈에 보이는 것 만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보지 않고는 말이 없어야 한다.

 

 

계곡마다 차려진 기암과 괴석들이

힘들 무렵이면 어김없이 새로 나타나 새로운 힘을 실어준다.

주왕산의 피로 회복제는 끊임없이 눈으로 온다.

지루할 틈이 없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오름에는 시간마저도 빠르게 간다,

 

 

담소하며, 완상하며, 느끼며....

그리고 부지런히 담아가며 오르고 오르다 결국은 맞이한 곳.

세상의 어떠한 오름에도 반드시 있으며 반드시 배알해야만하는 정상!

 

오늘, 또 하나의  새로운 정상을 배알할 수 있는 축복을

지금 허락받는 순간이다.

나의 가소로운 이력에 또 하나의 산님이 보태지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나의 산행길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정봉주(頂峰酒)!

오름길의 모든 고통을 떨쳐버리고도 훨씬 남는 장사인

이 맛!

그래 확실히 환상적인 맛이야~!

나는 사실 부끄럽게도 이 맛에 산에 가는지도 모른다.  

 

 

주왕산이 키워낸 푸성귀와 시장기로 조촐히 마련한 산채소반(山菜素飯).

지금 필요한 것은...

이들을 흡입할 약간의 시간뿐,

더 이상은 사치이고 나머지는 행복이다.

암브로시아가 왜 필요할것이며 넥타르가 또한 왜 필요하단 말인가.

이 땅의 순결한 자양분이 있고 피와 살로 즉시 전력이 될

막걸리가 있는데...

 

 

항상 산행은 오름보다도 내리막길이 어렵다.

등산화 끈도 다시 매고, 배낭도 고쳐매고, 등정으로 인한 해이한 마음도

옥죄고 추스려서 하산시작.

 

여기 하산길은 주왕산의 보석들이 널려 있단다.

안 보여주면 도굴을 해서라도

눈에다, 가슴에다 담아야 할 터...

 

 

군데 군데 각질같은 겨울 껍질들이 여전히 창궐하고 있다.

비록 조금은 무뎌지고 송곳니는 부러져

그 날카로움은 다소 무뎌졌지만 아직은 장수의 모습으로 건재하다.

 

 

만년설같은 모습으로 철옹성을 자랑하던 그들도

벽이 허물어지고 물까지 새는 초췌한 패장의 얼굴로 누추하다.

아마도 주왕산의 봄은 땅 속 어디엔가 묻혀있다가

소리로 부터 오는 모양이다.

뚫린 겨울 구멍 사이로 봄소리가 나머지 겨울을 추궁한다.

빨리 떠나라고...

 

 

봄은 고양이라고 하던데.

봄은 누이의 작은 손길이라고 했는데...

주왕산의 봄소리는 옹골차다못해 맹렬하다.

조용히 가만 두어도 겨울은 그냥 제 풀에 사라질터인데...

가녀린 싹으로 시작하는 봄도 겨울에겐 처절하도록 냉철하다.

세월 만큼이나...

 

 

잔해로 가득하다.

허물 벗은 겨울 잔해랑 다시 잎으로 돌아갈 지난 가을의 잔해랑,

인간이건 계절이건

떠난 자리에는 잔해와 배설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오고

또 그렇게 간다.

 

 

물밑에서도 예외가 없다.

겨울이 부서지기도 전에 소리부터 들린다.

얼른 두껑을 열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나마 겨울은 지난 가을의 전설까지 미련처럼 보듬고 있는데...

 

 

제 3 폭포...

두 줄기의 물줄기를 가지고 있어서 쌍폭, 혹은 용폭이라 부른단다.

지난 겨울에는 암반처럼 견고했을 웅덩이에도 이젠 물이샌다.

이불을 걷어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하얀 솜이불을 서서히 걷어내고 있다.

손발만 없다는 것 뿐이지 그들도 계절맞이는 인간과 다름이 없다.

사지수족 건재한 나는 아직도 겨울 이불 그대로 인데...

 

제 3 폭포는 주왕산 폭포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크다고...

 

 

제 2 폭포 가는 길...

주왕산의 4대 명물은...

주방천의 수달래, 정상부의 회양목, 송이 버섯, 그리고 바위를 뒤덮고 있는 천년이끼...

산행 내내 온통 바위들을 덮고 있는 이끼 군락은 그야말로 명물이라 불릴만 했다.

 

주방천의 수달래는 봄이 익어야 볼 수 있는 진달래 종류이다.

이 곳 주왕산의 고유 수종으로 주왕이 신라 마장군에게

죽임을 당할 때 흘린 피를 머금어서 색깔이 피빛이란다.

 

 

동장군이 드리웠던 철의 장막도 그 허리 한토막을 베어내고

부끄러운 속살을 보인다.

멀리서 보고는 이곳이 제 2 폭포인 줄 알았다는...

 

 

저것은 물방울이 아니다.

겨울 방울도 아니다.

그렇다고 봄 방울도 아니다.

저것은 또 하나의 세월을 보내고 맞이하는

세월의 눈물방울이다.

 

 

제 2 폭포....

몸소 가까이 가야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지금은 음습한 냉기에 휩싸인 그저 응달의 자리이지만

삼복염천이 오면 천혜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을 듯...

 

폭포의 모습이나 지형적 조건으로 볼때 제 3 폭포보다 훨씬 아름답다.

 

 

여기는 아직도 더 많은 백색 이불을 덮고있다.

그러나 울부짖는 봄의 절규는 여전하다.

여기도 폭포는 제3폭과 같이 2중구조다.

바위의 구조들에서 세월에 침식된 연륜이 역력하다.

그리고 절묘하다.

 

 

 

한 떼의 까마귀들이 맴돌다 가더니

또 다른 산새들이 겨울의 이별통에 화음을 맞춘다.

직박구리, 곤줄박이, 박새...

하긴 그들도 봄이 반가울게다...

그토록 여린 의상으로 지난 혹한을 지냈으니...

 

 

한모금 떠 마신 계곡수의 물맛이 참으로 별미다.

입안에 정제된 박하향이 가득하다.

싱그런 차가움이 온몸에 경련을 일으킨다.

수많은 말에 찌든 구강을 청소하고 다시 한 모금을 떠서

이번에는 오장육부를 비워낸다.

 

저렇게 나뭇잎은 제 몸을 던져서 세월을 이기는데

저렇게 겨울은 제 살을 녹여서 봄을 만드는데

나는 이번 산행에서

무엇을 비워내고 무엇을 만들어서 갈지,

아직도 내 속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1970년대 이전, 계곡 뒤로 길을 내기 전에는 미답의 계곡,

 

느낌으로 담아내기에는,

인간의 언어로 뱉어내기에는 무리다.

너무나 절묘해서 눈을 감고싶은 곳,

 

 

억겁의 세월을 돌아서 나온 저 골은 단순한 골이아니다.

저기에 흐르는 물은 그저 흐르는 물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모아서 녹여낸 세월의 질화로일 것이며,

세상 산들의 모든 진액을 모아서 흐르는 세월의 정수일 것이다.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구성해야 저런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저 불가해한 억겁의 세월의 현장을 볼 수 있어서

지금은 행복할 뿐,

말을 잃었다.

 

 

 

 

제 1 폭포....

인적이 끊겨있던 그 시절에는 아마 신선들과 들짐승들만의 정원이었을 듯.

적당한 깊이의 물, 알맞은 너비의 모래사장, 그리고 한나절 열기를 막아줄

탁월한 그늘, 참으로 탐이 나는 곳...

이렇게 깊디깊은 계곡속의 얼음폭포 밑으로도 여전히

봄의 신랄한 지저귐이 들린다.

 

 

 

 

 

 

학소대(鶴巢臺)...

청학과 백학이 사랑을 나누며 터를 이루고 살았다는 곳.

사냥꾼의 만행으로 지금은 사라졌다는데...

아니다!

청학과 백학은 아직도 건재하며 여전히 농익은 사랑을 나누고 있어야 한다.

여기 이곳은 최소한 그런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사랑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데...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았다고 해서 시루봉...

대체로 이런 바위는 시루봉 아니면 장군봉 같은 명칭을 얻는다.

학소대에는 청학과 백학의 사랑장소라서 가서는 안되지만

저~기 위에는 뭐가 있을까.

혹시 천년 묵은 동자삼이라도 있지 않을까,

많이 궁금하다.

 

 

남들은 다섯시간이면 충분한 코스라지만....

나는 무려,

무려 일곱 시간이나 걸렸다.

체력부실...그 탓만은 아니다.

주왕산 탓이다.

 

물론 나는 모든 길들, 모든 산들을 남보다  오래끌어서 오래 보고 느끼며 걷는다.

그것은 나의 최종 목표지점에서 나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시간여유가 있기때문이며,

가장 확실한 이유는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며, 더 많이 담기 위함이다.

 

봄의 초입에 찾은 주왕산 산행,

거기서 찾은 것은

다음산이 더욱 기다려 진다는것,

그리고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는 것.

그만큼 아름다운 산이었다.

주왕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