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도 배우고 오랜만에 해변에서 푹 쉬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이제 할일은 와라스로 가는 일이었다. 미리 봐둔 해변 근처의 여행사 – 버스회사인줄 알았으나…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음 – 로 가서 버스티켓값을 알아보았다. 만코라에서 와라스까지 직행은 없고 반드시 Casma를 경유해야 하는데 Casma까지 가는 티켓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외 다른 회사에도 알아봤지만 역시나 같은 대답. 흥정 끝에 65솔로 합의를 보고 호스텔에 체크 아웃 후 뚝뚝을 타고 약속한 오후 5시까지 여행사에 도착했다.

내 표를 확인한 직원은 다시 나를 뚝뚝에 태워서 큰 길의 어느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몇명의 서양애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직원은 내 티켓을 그곳 현지 직원에게 주며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얘기를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새로운 정식 티켓을 발권중이었다.

여행 동안 갈고 다듬어진 나의 촉(이순간 별로 쓸모 없는)은 사무실 앞에 세워진 버스 회사 이름을 본 후 이 회사가 진짜 버스 회사고 내가 티켓을 끊은 곳은 여행사라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이냐마는…- 결론적으로 난 여행사에 커미션을 주고 원래의 티켓값에서 더 비싸게 주고 사게 된 것이었다. 어쩐지...티켓을 살 때 다른 곳에 전화해서 티켓값을 물어보더만...

멕시코, 콜롬비아, 에콰도르와는 달리 따로 버스 터미널 없이 각 버스 회사에서 티켓을 구입해야 하는 페루 시스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변 근처에 있는 사무실이 난 버스 회사인 줄 착각한 것이었고 각 여행사마다 돌아다니며 금액을 흥정했던 것이었다.

진짜 버스 회사는 해변에서 호스텔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나오는데, 처음 만코라에 도착했을 때 내렸던 버스 정류소 근처에 있었다.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호스텔 가는 도중에 들려서 물어봤을 텐데...한국 돈으로 따지면 그리 큰 돈은 아니겠지만 뭔가 속은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여행 다니다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는 것이 다반사. 그냥 다음번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작은 교훈을 얻었다며 나를 위로했다.

원래 버스 시간을 훌쩍 넘겨 한참을 기다린 후 6시 30분에서야 버스는 도착했고 내가 구입한 세미까마 좌석에 올랐다. – 일반적으로 남미 내 야간 버스는 세미까마(Semi cama)와 까마(Cama) 이렇게 둘로 나뉘는데, 세미까마는 약 120도정도 뒤로 젖힐 수 있게 되어 있고 까마는 180도 정도 젖힐 수 있어 까마 티켓이 좀더 비싸다. 남미를 돌며 한번도 까마를 타본 적이 없는데, 내 몸집이 그리 크지 않고 웬만한 불편쯤은 감수할 생각이 있어서 언제나 저렴한 세미까마 좌석만 이용했다. 세미까마 중에서도 좋은 좌석은 버스 가장 앞 좌석(가장 먼저 판매되기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찍 예매해야 한다)과 오른쪽 두번째(혹은 세번째)좌석인데, 그 이유는 가장 앞 좌석은 창문에 앞으로 나 있어서 그 앞 공간을 더 활용할 수 있고 다른 좌석보다 약간 넓으며 앞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답답한 느낌이 덜하다. 그리고 버스종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오른쪽 두세번째 좌석은 뒤에 좌석이 없이 버스로 올라오는 계단이 있어서 잠잘때 뒤로 맘껏 젖힐 수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때로는 그 뒤에 음료수 등을 넣어놓는 상자라던가...그런게 있어서 다 젖힐 수 없는 경우도 간혹 발생한다. 암튼 세미까마 좌석의 갑은 젤 앞자리.

반대로 가장 불편한 좌석은 뭐니뭐니해도 화장실 옆. 보통 화장실이 버스 젤 뒤편에 있기 때문에 뒤쪽이 안좋은 좌석인데 밤에도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풍기는 화장실 냄새를 생각하면...

당일 날 버스티켓을 구입했기 때문에 내 좌석은 제일 앞 좌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화장실 바로 앞쪽도 아니었다.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점의 적도 부근이라 해가 비교적 일찍 지는 바람에 버스가 출발할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져서 어두워졌다.

12시간 가량 걸린다고 했지만 잠결에 눈을 떠보니 한참동안 버스가 움직이지 않아 바깥을 살펴보니 버스가 고장난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이튿날 아침 8시면 도착할 버스가 10시가 되어서야 까스마(Casma)에 도착했다. 사실 까스마 행 버스가 아니라 리마행 버스여서 까스마에 내리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한명 뿐이었다. 어쩜 이렇게 만코라에서 와라스 가는 사람이 없는건지...

분명 그때 여행사 직원이 까스마에 가면 와라스로 가는 버스가 많다고 했는데 정작 버스에서 내려 그 일대를 찾아봤지만 까스마로 가는 버스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회사는 대부분 작은 밴(VAN)으로 와라스까지 간다고 했지만 최소 5~6시간은 가야할 와라스를 밴을 타고 간다면 더 힘들 것 같아 대형 버스로 가는 회사를 찾아야 했다. 

터미널이 따로 없는 탓에 어느 시장 부근에 내려준 상황이라 무거운 짐들을 이끌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 겨우 와라스로 간다는 버스회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와라스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내 바램과는 달리 버스는 2시나 되어서 온다고 했고 무한정 그곳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사정 얘기를 하고 짐은 사무실 안에 맡겨 둔 채 작은 백팩만 – 그래도 35L – 메고 근처를 돌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잔뜩 쫄아서 다시 버스 회사로 돌아와야 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2시가 되었지만 온다는 버스는 오질 않고 왜 안오는지 물어보니 중간에 버스가 고장이 나서 그렇다고 했다.

무슨 페루버스는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건지...결국 3시 30분이 되어서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기다림에 지쳐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3시간쯤 달렸을까...버스는 어느 작은 마을에 정차를 하더니 모두 버스에서 내려 옆에 있는 버스로 갈아타라고 한다. 정말 버스의 난이다.

해발 3,000m의 와라스로 가는 길 답게 버스는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을 잘도 올랐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가야하기에 큰 버스로 이동할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길고 지루한 버스 여행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그나마 mp3에 저장된 컬투쇼 덕분이었다. 오랜 버스 이동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허리와 다리에 통증이 시작되고 엉덩이의 감각이 사라질 때에도 컬투쇼를 들으며 이겨낼 수 있었다. – 정말... 여행할 때 가장 필수품 1위는 컬투쇼 mp3파일인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10시. 만코라에서 출발한지 약 27시간 30분만에 와라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어둑해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오불당에 추천되어 있는 Hostel Churup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친 몸에 언덕을 올라 가는게 사실 불가능할 것 같아 가는 길에 보이는 호스텔에 들어가 자리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대부분 다 찼다고 해 어쩔 수 없이 기어올라가야 했다. 사실 가고 있는 곳마저 다 찼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빈 방이 있어 그곳에서 묵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