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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게 / 곽재구 뚜르 23.10.02 18:29:39 340읽음

 

 

 

그리움에게   / 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비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드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 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알았다

길고 끈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을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 곽재구,『沙平驛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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