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남자의 가슴에 모래바람이 불었다

어렸을 때 내겐 두 가지 꿈이 있었다.

하나는 화가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007〉의 제임스 본드 같은 국제적인 첩보원이 되는 거였다. 서로 연관성도 없고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나는 이 꿈들에 꽤 진지했으며 실현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꿈은 모두 좌절됐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내가 아주 특별하고 멋있는 인생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보는 어른들처럼 먹고사는 데 급급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린 나이부터 짊어진 생활의 무게에 몇 번 짓눌리자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세상의 쓴맛과 현실의 무서움을 겪고 난 청년은 국제적인 첩보원이 되어 전 세계를 누비며 스릴 넘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 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적지만 따박따박 월급을 받고, 정년 보장도 확실한 9급 공무원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꿈을 접은 뒤로 더는 아무 꿈도 품지 않았다. 대신 성실한 직장인으로, 가장으로, 아빠로, 그렇게 보통 남자로 살아갔다. 2001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휴일에 남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별 감흥 없이 그저 눈만 주고 있는데, 프로그램이 바뀌더니 화면 가득 누런 사막이 펼쳐졌다. 카메라가 지면을 향해 다가가자 멀리 점처럼 보이던 게 사람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라토너들이었다. 장딴지에 힘줄이 불끈 선 그 남자들은 모래먼지를 맞으며 사막을 횡단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내 가슴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들었다. 굳게 잠겨 있던 빗장이 ‘삐걱’ 하고 풀린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두근하더니 그 두근거림이 격한 압박으로 변했다. 사막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그 기분은 가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겨울이 시작되자 두근거림은 가슴앓이로 발전했다.

‘나쁜 짓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사막에 가는 건데 이런 일로 직장에서 밀려나겠어, 아니면 이혼을 당하겠어. 남들이 뭐라 하는 게 뭔 대수라고.
이 정도는 저질러도 괜찮아. 나 김경수, 이 정도에 인생 망가질 만큼 허술한 인간 아니야!’
오랜 고민 끝에 직장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이 정도 선물은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자신했다.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막에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첫 번째 난관이자 가장 큰 어려움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작정했다.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것.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예요? 뜬금없이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고 5백만 원이나 되는 남의 돈을 갖다 써요? 더군다나 안 가봐도 뻔한 사막 같은 곳엘 가겠다고 말예요.
당신, 가장이에요. 애들 생각은 안 해요? 무슨 헛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요!”

예상대로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아내의 마음도 짐작이 됐지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 얘기한 것들, 나도 그간 수없이 생각하고 고민했어. 그런데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접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어. 이렇게 포기해버리면…, 앞으로 난, 점점 더 무의미하게 살게 될 것 같았어. 무난하게는 살겠지만 말이야.
몇십 년 만에 지금 겨우 눈을 뜰 기회를 발견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보내버리면…. 난 이제 그렇게 살기 싫어, 여보.”

이 말을 하면서 내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내가 가슴앓이를 했던 진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나는 눈물을 꾹 눌러 삼키며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그렇게 아내와의 냉전이 시작됐고 나는 1년 가까이 체력 훈련을 했다. 좋은 트레이너를 만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생활 자체를 훈련처럼 해야 했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됐고 드디어 사막으로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그동안 아내에게 하지 못한 말들, 미안함과 나를 이해해달라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써서 탁자에 올려뒀다.며칠 뒤 아내는 내가 사하라사막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서야 내게 사막에서 꼭 필요한 방풍자켓을 사서 선물로 주었다.

여전히 냉정했지만 그 선물의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사막으로 떠나게 됐다.

위 글은 명진출판에서 출간한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 없는 인생이다>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 없는 인생이다 <김경수> 저

명진출판, 2013년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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