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태어난 한옥남 시인!
강릉여고 영어 선생님을 역임하시고
지금도 후학을 위해 가르침을 하시면서,
작가의 길을 걷고 계시는
한옥남 님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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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자연재해
한옥남 시인
대학생 시절 영미문학 시간에 영시 낭송을 듣곤 했다.
가장 인상 깊게 들었던 시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의
⌈눈 내리는 저녁 숲속에 서서 ⌋
라는 시이다.
시인은 눈이 내리는 숲 속에 잠시 서서 숲 주인 몰래 설경을 즐기고 있다. 동행한 조랑말은 1년 중 가장 캄캄한 밤에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멈춘 시인이 이상하다는 듯 방울을 흔들지만, 시인은 부드러운 바람, 눈송이와 흩날리는 아름답고 어둡고 깊은 숲 속에 오래 머물고 싶다. 인생의 아름답고 달콤한 순간을 오래 만끽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인 듯하다. 그러나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에 시인은 가야만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But I have a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네.
그래서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가야만
하네.
그래서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가야만
하네.
마지막 구절을 낭송할 때 정말 미련이 뚝뚝 흐르는 애절한 목소리로 읽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인은 저음의 굵은 목소리로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덤덤히 무뚝뚝하게 시를 마무리했다.
이십 대의 풋내 나는 인생 초보자인 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낭송이었다.
지금 나는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여기는 199구급대입니다. 따님이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 떨어져서 지금 제생병원 응급실로 이송하겠습니다."
강의 중이던 나는 강의실을 뛰쳐나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남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들어. 지금 얘가 제생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대.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렀다고 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운전해서 병원으로 가."
"뭐라고?" 놀라서 소리 지르는 남편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운전해서 병원으로 가야 해"라고 다시 말하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거렸다. 남편은 응급실에서 눈앞에 딸을 두고도 딸을 찾아 헤매었다고 한다. 다행히 눈두덩이가 좀 찢어진 것 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서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가슴 철렁이는 몇 번의 사건을 더 겪으며 7년 동안 거의 3분의 1은 병원을 들락거리며 보냈다.
내 삶의 존재 이유와도 같았던 딸이 호주 변호사.로 임명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엄마 넘어져서 안경이 깨졌고 조금 다쳤어." 물리치료도 멀리 해외에서 걸려 온 전화 속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로스쿨 내내 힘들어 했었고 몸이 많이 약해져 있을 때였다.
"잠 좀 푹 자고 잘 먹으렴." 늘 하던 대로 이역만리에 있는 엄마로서는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엄마 병원에 입원했어." 또 다시 반복되는 딸아이의 전화 속 목소리는 울먹거렸다.
"안 되겠다. 좀 쉬자. 한국으로 들어오렴." 공항에서 마주친 딸은 휠체어를 타고 공항도우미에 의해 출구를 나왔다. 마중을 나간 남편은 딸을 알아보지 못했고, 아빠를 부르는 딸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며 주저앉을 뻔했다. 초라한 몰골로 집에 돌아간 딸 아이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떨렸고, 눈 깜빡임으로 글씨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리고 이유 없이 갑자기 다리의 힘이 풀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고, 각종 검사를 한 결과 희귀성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정확한 발명 원인도 완치 치료법도 현재까지는 없다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얼마나 힘들게 한 공부인데, 얼마나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자랑스럽게 변호사 자격증을 들고 연수원을 나오면서 이제 꽃길만 쭈욱 걸어갈 것 같다고 기뻐했는데......
"왜 이런 일이 내 아이에게!" 하나님께 왜 왜 왜를 수십 번 외치며 울고불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이 병과 관련된 기사란 기사는 다 뒤지고, 유명하다는 한의원과 민간 치료 방법을 다 검색하였다. 딸의 치료를 위해 집을 팔고 병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고, 또 이사를 하고 7년 동안 네 번이나 이사를 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매달릴 방법밖에 없었다.
정말 읽기 싫어하던 성경의 욥기를 몇 번을 읽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곧 좋아지겠지, 신약이 나오겠지, 괜찮아, 괜찮아 나을 거야'라고 수십 번 반복했다. 정말 기적처럼 내 아이가 낫길 바라며, 딸을 부축하고 걸으면서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어린 시절 부르던 복음성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어느 날은 요한복음을 읽고 읽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 자기 죄 때문이지, 부모의 죄 때문이지......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라 했다. 나 역시도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예수님께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소리쳤다.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인생 속에 일어난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 어떻게 왜 일어날지 알 수도 없고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재해.
온갖 뉴스 속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던 때에는 남의 일이라 관심조차 없었고, 그냥 겉으로만 안타까워하며 지나쳐버린 수많은 일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인생 속에 알 수 없는 자연재해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되었다. 내 아이처럼 발병 원인도 치료 방법도 확실히 알 수 없는 희귀병, 갑자기 발생하는 전염병과 읊조려 본다 지진, 산불, 폭풍, 무선 강력 사건 같은 것들이 내 뜻과 상관없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단지 피조물인 인간임을 깨닫는다.
병명을 알고 난 후 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아름다고 깊은 고요한 숲에서 오래 머물고 싶지만,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속에서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던 시인의 노래를 나지막이 읊조려 본다.
But I have a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네.
그래서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가야만
하네.
그래서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가야만
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