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 김용현저
"저예요, 선생님."
현관문을 열자마자 중년의 여자가 쓰러지듯 수혁의 가슴으로 안겨들었다. 엉겁결에 술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부축하여 거실 소파에 앉혔다.
"아니, 은영 씨가?"
그는 황당한 눈빛으로 그 옛날에 같은 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던 그녀의 흐트러진 열굴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갔어도 여전히 서글서글한 눈매는 아름다웠고 굵게 파마를 한 숱이 많고 긴 머리는 처녀 적 그대로였다.
"네, 선생님 뵙고 싶었어요."
슬픔으로 금세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요, 저도 소식이 궁금했어요. 반가워요."
그는 마주 앉아 그녀의 두 손을 잡고 무슨 사연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생님, 술이 있으면 저 한잔 주세요!"
고개를 숙였다.
그때서야 차도 내올 경황이 없었음을 생각하며 소주와 햄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서로 사랑했으나 헤어진 운명을 회상했다.
안주도 없이 연거푸 술잔을 비운 그녀가 울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저 살기 싫어요. 선생님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꼭 한번만 만나고 싶었어요. 흑!"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독신생활을 하던 터였다. 난감하여 어깨를 감싸 안고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취기로 얼굴이 불과해진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듯 그간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목사집안인 부모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그렇게 선생님을 배신하고 떠난 죄를 제가 받았어요. 부유한 집안의 젊은 한의사와 결혼해서 교직도 놓고 한의원 안살림만 했어요. 신혼 때는 잘 나가서 첫아들과 딸애를 낳았어요. 그런데 남편이 환자 중의 한 처녀와 1년 동안이나 외도를 해온 걸 한 달 전에야 알았어요."
술을 더 청해서 따라 마시고는 실성한 듯 머리채를 흔들며
"그날 눈앞이 캄캄하고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요. 일곱 살짜리 아들과 다섯 살 난 딸을 생각하니 그것들마저 꼴 보기가 싫었어요. 그날따라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피아노 학원을 가야 할 시간인데도 갈 생각을 않고 게임기만만지며 제 방에서 나오질 않는 거였어요. 어찌나 미운 생각이 들었던지 그런 남편의 자식을 낳았다는 게 모멸스러웠어요. 저는 순간 분통이 터져 애를 끌고나와 세탁기 뚜껑을 열고 아이를 집어넣었어요. 영문을 모르는 아이가 부들부들 떠는 걸 머리를 쥐어박고 뚜껑을 닫았어요. 엄마, 엄마! 울음소리를 아스라이 들으며 저는 전원 단추를 누르고는 세탁기를 돌려버렸어요. 얼마를 돌아갔을까, 세탁기 도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섞여 들렸으나 외면했어요. 죽어라, 죽어! 제 마음 속은 온통 살의만 가득했어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스위치를 끄고 뚜겅을 열었더니 아이가 실신을 했더라고요. 흑!"
그는 헝크러진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우는 그녀를 한없이 가엽고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의 얼굴을 가슴으로 감싸 안고 함께 울었다.
"어쩌다 그런 끔직한 일을 했어요. 어쩌다가…"
그는 당장 남편이란 작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아 패죽이고 싶었다.
"수혁씨, 제가 죽일 년이에요. 제가… 으흑!"
"은영씨! 흑!"
혼자 살던 집에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두 사람의 흐느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저 풀꽃 한 송이
개인시집 (누군가 강을 건너고 있다) 중에서
출처 : 수지나라(https://blog.naver.com/kjsoo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