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방 / 이선영
화가의 전시회에 가서
사진 속에 있는 그의 방을 들여다본다
원통형에 가득 꽂혀 있는 갖가지 굵기의 붓과
(저렇게 많은 붓이 필요하구나! 붓들의 종류가 저처럼
많다는 것을 나는 눈으로 처음 경험한다)
직접 만들었음직한 여러가지 색깔의 물감이 각각 담겨
있는 항아리 모양의 용기들과
어지럽게 널려 있는 트럼프 낱장들 가운데
(화가의 원색적이고 강렬한 색채를 닮아서일까)
오도카니 앉아 있는 화가의 자태
그를 몰두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만일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림은 그려질 수
있을까
그런게 아니라면 화가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말똥구리처럼 끊임없이 굴리고
구르며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일까
그의 방에 화구들이 갖춰져 있는 것이라기보다
화구들이 가득 가득 차지한 방 한구석을 비집고 앉아 있는 그
에게 묻는다
그대의 그림은 자기애인가, 자기염오인가
그대의 골똘한 눈에 넘칠 듯 글썽이는 광기는
자기애인가, 자기염오인가
아니 자기염오란 자기애의 다른 얼굴일 뿐일까
그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그 자신을 못이기도 하고 그 자신을 넘어서기도 하는
화가의 방 앞에서 오래 들여다본다
못내 마르지 않는 깊고 바닥없는 우물인 화가의 얼굴
화가의 붓은 휘젓는다, 늘 배반당하는 자신을 또한 늘
배반하는 자신을
- 포도알 남기는 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