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칼럼(대중문화) - 여성포털이지데이

감독 : 멜라니 로랑

주연 : 벤 포스터, 엘르 패닝

그저 러닝타임이 짧아 선택한 영화

화요일 저녁, 내겐 더도 덜도 말고 딱 1시간 30분이라는 여유 시간이 생겼다. 이 여유 시간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며 뒹굴까 생각도 했지만 12월 30일 서비스 종료를 앞둔 oksusu에 아직 봐야 할 영화가 많기에 일단 oksusu를 켰다. 문제는 1시간 3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이다. 러닝타임 2시간 꽉 채운 영화들이 대부분이기에 1시간 30분이라는 여유 시간은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즐기기에 모자라다.

찜해 놓은 영화 리스트를 러닝타임에 맞춰 흝어 보았다. 그러다가 "바로 이 영화다!" 싶은 영화에서 내 눈이 멈추었는데 그것이 바로 [갤버스턴]이다. [갤버스턴]의 러닝타임은 1시간 34분. 엔딩크레딧이 거의 5분 정도 차지함을 감안한다면 1시간 30분의 여유 시간에 딱 알맞은 영화인 셈이다.

솔직히 [갤버스턴]은 내 취향의 영화가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찜해놓은 이유는 단지 엘르 패닝이 주연을 맡았다는 것과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나우 유 씨 미 : 마술 사기단]에 출연한 프랑스 배우 출신 멜라니 로랑이 이번엔 감독을 맡았다는 점 뿐이다. 대체적으로 나는 벤 포스터 주연의 영화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데, 이유는 그가 주연을 맡은 대부분의 영화 분위기가 너무 어둡기 때문이다. [갤버스턴]도 딱 그러했다.

지옥 속에 살고 있는 두 남녀의 여정

[갤버스턴]은 병원에서 폐에 문제가 있다는 진료를 받는 로이(벤 포스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로이는 의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병원을 박차고 나온다. 그는 이미 자신이 시한부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스탠(보 브리지스)은 로이에게 은밀한 뒤처리를 맡기고, 로이의 지옥 같은 일상은 이렇게 또 진행된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스탠이 배신을 했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로이는 열아홉 소녀 로키(엘르 패닝)와 함께 도망을 나온다. 사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자포자기한 로이. 그런데 자꾸만 록키가 눈에 밟힌다. 그녀 역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었고, 그와는 달리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그녀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다. 로이는 그녀를 지옥에서 건져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록키가 자신을 성폭행한 계부를 살해하고 집에서 어린 여동생 피타니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스탠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이제 살인에 납치 누명까지 쓰게 될지도 모를 상황. 게다가 어린 피타니를 돌보려면 돈도 필요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록키에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다. 한평생 시궁창 인생을 살았던 로이. 죽는 마지막 순간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일일지라도...

그들은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대로 [갤버스턴]의 영화 분위기는 굉장히 어둡고 암울하다. 영화에서 조금 밝은 빛이 보이는 장면은 로이와 록키, 그리고 피타니가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과 록키를 지옥에서 구하기로 결심한 로이가 록키의 마지막 데이트 정도뿐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고는 곧바로 가장 잔인한 장법으로 로이와 록키를 최악의 상황으로 밀어 넣는다.

솔직히 영화 후반 로이의 복수를 기다렸다. 마지막 희망까지도 잔인하게 짓밟아버리는 스탠을 향한 로이의 속 시원한 복수. 하지만 영화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로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지고 감옥으로 향한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피타니를 위해서이다. 로이와 록키는 비록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피타니만큼은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것이 로이를 스스로 도한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끔 이끈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철저하게 비극이다. 하지만 20년 후 숙녀로 자라 로이를 찾은 피타니(릴리 라인하트)의 모습 만으로도 이 완벽한 비극은 해피엔딩으로 변한다. 로이와 록키의 희생이 피타니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니 그 희생을 부질없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타니를 뒤로하고 태풍 속으로 위태롭게 걷는 로이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아직도 지옥 속에서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피타니를 위한 그의 삶은 그동안의 삶과는 달리 가치가 있었음을 알기에...

비록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갤버스턴]은 내 취향의 영화가 아니다. 예상했던 대로 영화는 너무 어둡다. 영화 초반 로이가 함정에 빠지는 장면 등은 화면이 너무 어두워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벤 포스터는 언제나 그렇듯 씁쓸한 하류 인생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원하는 영화의 즐거움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여운이 남았다. 어쩌면 로이의 복수로 영화가 끝났다면 관객 입장에서 속은 시원했을 테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갤버스턴]을 그저 그런 B급 범죄 액션 영화로 치부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의 여운은 복수가 아닌 피타니를 위한 희생을 선택하는 장면 덕분이다.

도대체 로이의 선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록키도, 피타니도,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지 며칠이 되지 않는 남일뿐이다. 게다가 그는 시한부도 아니다. 국가의 지원으로 병은 충분히 완치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인생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될 텐데 그는 피타니를 위한 삶을 선택한다. 그러한 맹목적인 희생. 거칠게만 보이던 벤 포스터에게서 발견한 숭고한 희생 덕분에 [갤버스턴]은 그저 그런 B급 범죄 액션 영화가 아닌 여운이 남는 영화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