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한 법도 따뜻한 가슴을 만나면
서울 서초동에 있는 대법원에 가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인 디케상을 볼 수 있다. 율법의 여신 테미스와 주신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디케는 정의가 훼손된 곳에 재앙을 내린다. 일반적인 디케상을 두 눈을 감거나 가리고 있다. 이는 디케의 정의가 인종, 계급, 성별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엄격한 법 집행을 상징하는 칼을, 왼손에는 공명정대함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판사의 직무를 수행하며 나는 ‘디케가 과연 냉철하고 정의롭기만 한 법의 여신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오히려 디케는 인간만큼이나 따뜻한 심장을 가졌기에 온정에 흔들리지 않으려 눈을 가리고 저울을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라 구아르디아 판사)
“법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빵을 훔치면 법을 어긴 것이니 벌금 10달러를 선고합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딸과 며칠을 굶은 손녀들을 위해 빵을 훔친 노인에게 판사는 예외 없이 벌금형을 선고했다. 사연은 안타깝지만 공정하고 엄격히 법을 집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 대신 판사는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 노인에게 건네며 그 돈으로 벌금을 납부하라고 했다. 법을 집행하는 판사가 아닌 인간으로서 품는 온정이었다. 그런데 판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50센트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이웃인 저기 저 노인이 굶주린 가족을 위해 빵을 훔치는 불쌍한 사람이 돼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일 잘 먹고 잘 산 나에겐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판사는 노인과 동일한 벌금을 자신에게 매겼고,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자기 모자에 담고는, 법원 경위에게 벌금을 걷도록 지시했다. 노인을 고소한 빵집 주인을 포함해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이 흔쾌히 벌금을 냈고, 덕분에 47달러 50센트가 노인에게 전달되었다. 이 이야기는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라 구아르디아 판사의 명판결로 유명한 일화이다.
신을 대신해 정의롭고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는 책임감과는 별개로, 판사도 인간인지라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피고인을 보면 마음이 아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법복을 입은 이상 인간적인 온정을 베푸는 정도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사연이 안타까워도 법으로 정해놓은 양형 기준에 따라 관대함을 베풀 수 있을 뿐, 죄를 지은 이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거나 구속이 불가피한 이를 석방해줄 순 없는 노릇이다. 법복을 벗고 법대에서 내려온 후에야 평범한 이웃으로서 피고인과 그의 가족에게 작게나마 온정을 베푸는 게 가능하다.
내가 판사 생활을 마무리 짓던 날, 나는 아쉬운 한편 누군가에게 법의 이름으로 더 이상 칼을 들이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칼의 무게가 내게 버거웠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 칼로 수술 받는 사회적 환자와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에 가슴앓이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의로운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고 노력하지만 오로지 ‘정의롭기만 한’ 법조인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정의롭기만 한 인간은 잔인한 인간’이라던 영국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정의롭게 법을 집행하면서도 따뜻한 심장을 지닌, 인간을 이해하고 보듬는 법조인이고 싶다. 법은 애초에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의의 여신 디케 또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피고인을 만나면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신전에서 내려와 그들의 가족을 따뜻하게 안아줄지도 모를 일이다.
